[Exhibition Topic] 올해의 작가상 2014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올해의 작가상  2014전>(8.5~11.9)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4 올해의 작가’ 후보 작가로 구동희, 김신일, 노순택, 장지아가 선정돼 동시대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뚜렷한 주제의식과 각자의 고민이 반영된 작품을 펼쳐보인다.
취재・인터뷰 이슬비 기자

 

구동희 | 재생길 Way of Replay

구동희 (8)

“다의적으로 체험하는 시간”

이번 작품의 제목인 ‘재생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의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체감시간을 뜻하며, 다시 유쾌하거나 불편하거나 놀아보는 공간적 성격, 지시하는 말 그대로 되풀이되는 방법 자체를 전시현장에서 물질적으로 구현하면서 이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다.
형광 노랑색 천으로 짜인 구조물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높낮이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는데 관객의 어떤 공간 체험을 유도하고 싶었는가? 형광색은 작업시기가 무더운 피서철과 겹치면서 작업의 외양이 전시장 층고 대비 위아래로 꽉 차 인공적으로 부풀거나 과장돼 보이는 측면이 재미있을 것 같아 택하였다. 관람자의 체험이 이 작업의 완결성을 담보로 한 절대적 조건이나 콘셉트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상상컨대 각각의 신체가 전시물에 안전하게 적응하는 스스로의 움직임과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인식의 시차를 의도적으로 분리해 전후 상황을 조합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서울대공원의 인상과 경험은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가? 전시장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보다 더 기억이 나는 장소는 개장 후 대학교 재학 시까지 방문하던 서울랜드였다. 현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전시 준비 차 기구 탑승자 관점을 촬영하여 당시에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 전체 작업의 배후 풍경이나 트랙 내 보행 시 시야를 간섭하는 요소로 사용하고자 했다. 산 중턱 전시장으로 향하는 도로 또한 이러한 기구들을 연상케 했다. 형광색 구조 중 커브 값이 커서 자세가 바뀌거나 전체 형태 조감 시 곡선이 부각되는 세 군데에 각기 다른 종류의 투 채널 트랙 운동 영상들이 들어가 있고 벽 투사용 영상에는 운동축이 다른 기구, ‘도깨비 바람’ 하나가 있다.
당신의 작업에 회전이나 나선형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이 같은 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롤러코스터는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이지만 <재생길>은 마지막에 점프라는 수직운동을 통해서 지면에 착지한다. 관람객의 동선을 어떻게 고려했나? 앞에 언급한 형상들은 운동의 궤적이나 패턴을 관찰하게 하거나 발생학적인 단서로서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전작들에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외양상 이러한 모습은 확실히 시작점과 끝점의 경로를 연상케 하고 시간성을 주입하고 거리대비 속도 등을 시각적으로 표상하여 상태변화를 왜곡하기에도 편리한 측면이 있다. 놀이동산의 운동기구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재생길>의 운동주체도 별일 없다면 결국 돌아올 것이다. 다만 설치 전 도면제작 과정 중 관람객의 동선은 꼭 출입구 쪽 트랙에서 시작하여 막다른 벽을 마주하게 한 후 트램폴린에 낙하하게 한다는 강박적 관람 매뉴얼은 없었고 커다랗게 노출된 형광색 구조를 시각적 가이드라인으로 잡고 이의 안과 밖에 관람객의 적극적 판단 개입을 통해 위치나 경로를 취사선택하게끔 하는 분기점을 배치해 놓았다. 전시장 내 사회적 거리만 서로 지킨다면 무언가 볼거리를 찾아 급히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으며 가만히 앉아 딴 생각을 하여도 무방하다.
관객이 직접 구조물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전모를 쓰고 관람객 안전수칙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 미술관이라는 제도권과 당신이 상상한 작품의 이상적인 경험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가? 작업 구상 단계부터 안전모와 안전수칙 동의서를 전시장 관람을 전제로 관객에게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인 관람자 보호와 작품 보존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미술관 제도의 행정적 측면과 창작과정의 확장성에 주로 가담하는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람객의 범주는 큰 편차가 있다는 것을 전시 설치과정 중에 발견했다. 물론 양측 모두 안전에 대한 이슈가 가장 민감한 현안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으나 이 내용을 전시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은 다소 달랐다. 최대다수의 최저 사고발생률을 염두에 두는 공공기관과 현장에서 작업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나의 입장이 서로 달라 작품 제작과정에 갈등, 협상, 타협이 개입되면서 최종 결과물이 도출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공적제도는 무사안녕과 안전을, 나는 모험과 자율성을 지지하는 묘한 입장차의 대상 자체가 작품과 가상의 관람객 간 물리적 충돌이라는 상황적 조건이었고, 이는 전시작 <재생길> 전체의 서브텍스트로 또한 적용되었다. 어찌 보면 현실을 마주하는 나의 무의식이 제안할 때 제작과정에서 이미(?) 예측된 우연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이상은 미술관 내 관람객의 신체에 제도적 부가장치나 작업의 연장으로서의 어색한 관객 참여형 매뉴얼을 아무리 덧대는 지원 혹은 통제시스템을 마련하더라도 경계에 대한 관람객의 공간 지각적 판단과 시각경험은 앞으로도 절대적으로 수동적 위치에 놓이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물잔과 ‘손 있는 날’이란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 담긴 와인잔은 관람자의 위치표지이자 전시 작품의 일부이다. 즉 전시 기간 중 불완전한 관계를 보여주는 매개물이다. ‘손 있는 날’은 말 그대로 음력기준으로 이삿날을 정할 때 운수와 방위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손’은 손님 혹은 마가 끼어 운수 없음을 뜻하며 전시를 위해 공간을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영역표시이자 대물 대인 간 상호 충돌 시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경계면으로 사용하였다.
미술과 경쟁, 수상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걸러내야만 하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 미술 내 경쟁 또한 현실의 일부이더라도 미술 존재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 수상제도는 인간이 고안해낸 성찬의 기념이지만 그 변별력이 모호해지면 가끔 예술가의 근시안적 보험이나 적립불가의 할인 포인트제도 같기도 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적 태도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앞으로의 계획은? 집을 치우고 가을 개인전을 준비해야 한다.

구동희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조소과와 예일대 미술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애니미즘>(일민미술관) 등에 참여했다.

 

김신일 | 이미 알고 있는 Ready-known

김신일 (7)

“예술은 결국 마음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문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문자들이 겹쳐져 있어서 읽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반영한 것인가? 문자는 이성의 대표적 시각물이다. 우리는 언어, 문자를 수단으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남과 소통하려 함은 아마도 언어적 요소만으로는 그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문자, 언어가 가진 힘과 작용에 많은 장점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적 소통과 예술적 소통을 합하려 노력한다. 어쩌면 사회적 약속으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는 예술의 한 기능인 소통과도 통하므로 문자를 예술에 끌어들여서 좋지 않을 것이 없다.
문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형상을 우리 식으로 단정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이 장점도 있지만 이미 내려진 정의 내에 사고가 갇힐 수 있는, 현상을 이해하거나 서술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 오히려 현상에서 멀어진 정의 자체만 난무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정해진 정보 내에서 파악되고 소통되어 정의된 것 이상으로 벗어나기 힘든 문자의 틀은 hot-media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hot-media를 cool-media로 바꾸는 작업이 문자 겹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읽기 어려운 문자를 통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이성적으로 읽어서 파악되는 문자가 아닌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되길 바란다. 마치 시가 언어적 요소로 표현되지만 언어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과 같이 문자작품을 통해 시와 같은 역할을 해보려 한다.
‘이미 알고 있는(Ready-known)’이라는 이번 전시 주제와 전시를 위해 선택한 세 단어, ‘마음’과 ‘믿음’과 ‘이념’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이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가만히 보면 마음에 따라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때로는 대립이 때로는 화합이 나오기도,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술도 결국 크게 보거나 작게 보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어떤 출발점이 되는 마음을 알아야 더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마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상황마다 다르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마음의 작용을 살피려 한다. 작용 없는 정의는 정의에만 머물기에 여전히 허공에 떠있는 구름을 잡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다. 마음의 작용을 생각하다가 다양함이 ‘있는 그대로’ 있는 ‘마음’, 그 다양함이 투명막으로 만든 벽에 갇히게 되면 ‘믿음’, 그 투명막이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면 ‘이념’이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마음에서 출발한 세 가지 단계, 인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단계를 대표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믿음은 과거에, 마음은 현재에, 이념은 미래에 가까운 것 같아 세 단어가 시공을 포용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Ready-known’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지성적인 면의 ‘이미 알고 있는’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정의에 의해 파악되는 정의가 앞서는 앎이고, 그 앎 이면에 이를 포괄하면서도 보다 직관적인 ‘이미 알고 있는’의 측면이 있고 그것이 예술을 가능하게 하지 않나 싶다. 전자는 문자적 측면이고 후자는 문자의 배열이 달라지고 다른 요소가 문자와 합하여 관객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 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측면에서 마음의 작용에 대한 세 단어를 사용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게 그대로 문자적으로 드러내서,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문자조각의 내용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이를 이해하려는 이성의 역할은 줄어들고 보다 직관적인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백색의 견고한 조각에 비디오 프로젝션을 통해 빛을 투사하는 방식은 언어에 대한 어떤 고민을 반영한 것인가? 언어, 문자로 파악되는 현상은 이들이 만든 여러 정의로 인해 분절적으로 파악된다는 의미에서 비디오 이미지가 문자에 의해 깨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상적인 면에서는 문자의 이러한 속성에 단점을 제기할 수 있으나, 우리가 만들어놓은 습관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장점을 보면 문자는 또 다른 다양함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쪼갬과 동시에 수많은 다양한 빛의 변화를 포용하는 문자라는 시각적 느낌을 나타내려 했다.
마을 풍경과 자연 풍경 사진을 픽셀이 드러날 때까지 확대한 뒤 교차시킨 영상 <42000초의 대화>는 어떤 작품인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북한산에 올라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이미지, 누구나 촬영했을법한 두 장의 상반된 사진으로 만든 영상이다. 두 장의 사진은 달리 보면 상반된 모습만 보이고 또 어찌 보면 공통된 요소를 볼 수 있는 도시와 자연의 사진이다. 사회적 대립의 느낌이 강한 이념적 이미지로 작업하려다가 방향이 전환되어 나온 이미지다. 우리가 흔히 대립의 극치라 보는 상반된 두 가지 이념도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왔기에 어쩌면 공통된 부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만 보면 다르고, 같다고 보면 같은 요소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 않나. 다른 것은 인정하고 그 공통의 부분에서 화해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시각화하기 위해 두 이미지의 물리적 공통지점을 찾으려 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인데도 픽셀로 되었을 때는 화면상 같은 면이 있다. 이 교차지점에서 두 이미지 A와 B의 자리를 바꿔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면을 보였다. 그리고 픽셀을 강조하는 이유 중엔 실제 있는 픽셀인데 우리의 물리적, 인식적 한계로 보지 못하는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면도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Ready-known’이란 마음이 미술과 생활에 끼치는 당연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보려는 주제다. 앞으로 이에 대해 지속적인 생각하고 실천할 것이다.

김신일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히로시마, 싱가포르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백남준아트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노순택 | 무능한 풍경의 젊은 뱀
Sneaky Snakes in Scenes of in Competence

노순택 (4)

“분단 풍경 속에 사진은 교활하다”

이번 전시장에서 공간 구성 콘셉트는 무엇인가? 크게 두 부분이다. ‘무능한 풍경’의 장면과 ‘젊은 뱀’의 장면이 공간적으로 구분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서로 넘나들게 구성했다. ‘무능한 풍경’은 지난 10여 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회적 갈등과 충돌, 참사의 장면을 담고 있다. 예컨대 대추리 강제이주, 용산참사, 쌍용차 살인해고,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사태, 세월호 참사 등이다. 이러한 사건 속 풍경은 참혹하다. 잔인한 풍경이라 부를까? 아니, 지극히 무능한 풍경이었다.
‘젊은 뱀’은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목격과 기록 혹은 개입의 역할을 수행한 ‘사진’이라는 매체의 작동 풍경을 담고 있다. 사진은 다양한 시각예술의 역사에서 발명시점을 꼭 짚을 수 있는 젊은 매체다. 태어난 지 175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진은 대중미디어의 영역에서도,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빠르다. 유능하다. 사실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능한 풍경 속에서 작동할 때, 그 유능이 무능의 반대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은 정직하기보다는 교활하다.
그동안의 작업은 일종의 분단 목격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거리 중에서 특히 분단이라는 이슈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가 품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가로지르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분단’을 말할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분단’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분단모순만으로 설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분단모순을 빼놓고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장들 앞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면서 늘 품어온 의문들, 합리의 결핍과 후안무치의 만행들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분단’은 중요한 열쇳말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 앞에서도 분단의 논리와 무논리는 작동한다. 유가족의 신상을 털어 사상을 검증하는 짓은 지금 우리가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분단은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 오(誤)작동으로써 작동한다. 나는 그 오작동의 장면들에 눈길이 간다.
이번 전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 오히려 사진에 대한 경계가 두드러진 것 같다. 사진은 재빠르고 사실적이며 유능하다. 언뜻 투명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불투명함을 잘도 감춘다. 그러하기에 대중매체도, 시위대도, 경찰도, 그리고 예술도 그토록 사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사회 갈등의 현장에서 카메라는 진압경찰의 방패와 진압봉만큼이나, 시위대의 구호와 바리케이드만큼이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사진은 분명 ‘있는 사실’에 기초한다. 허나 프레임 안만을 보여줄 뿐 프레임 밖을 보여주지 않으며, 특정한 시점을 보여줄 뿐 사건의 전후 시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일 것이다. ‘카메라가 나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는 저마다의 믿음들, 혹은 착각들.
사진의 힘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란 없다. 사진의 힘을 맹신했다면 진즉 사진을 그만뒀을 것 같다. 사진은 힘이 없다. 정작 힘은 대상에 있다. ‘대상의존적’이라는 사진의 가냘픈 속성이, 그러면서도 야비한 속성이 좋다. ‘장면의 중계’가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느 지점부터 불가능한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그 고민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일단 ‘현장에’, ‘나와’,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현장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작가로서 작업 사이에서 갈등은 없는가? 갈등이 있고, 갈등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갈등이 있을 법한 경계에서 작업하면서 해소를 바라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지금의 한국 현실이 ‘무능한 상황’이라면 사진은 현상의 표피를 훑는 ‘젊은 뱀’으로 표현했다. 이때 텍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부분 짧은 글을, 가끔은 긴 글을 꾸준히 써왔다. 어떤 경우에도 사진을 설명하거나 납득시키려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글이 사진을 ‘보완’하기보다는, 생각을 어지럽히거나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는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짓이지만, 불행히도 미술은 ‘쓸모없는 짓’을 용인하고 때론 장려한다. 아이러니는 미술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성분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 온 작업을 다시 보고, 분류하고, 재배치하는 와중에도 거리와 작업실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일을 이어가려 한다. 무계획의 계획이랄까. 발신안테나보다 수신안테나를 예민하게 세워두려 한다.

노순택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산미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중퇴했다. 서울,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2 광주비엔날레>, <2013 Real DMZ>, <2013 에르메스미술상전>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장지아 | 금기는 숨겨진 욕망을 자극한다
Taboos Stimulate Hidden Desire

장지아  (1)

“고통과 쾌락의 경계, 해체되는 순간까지”

최근 신체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는 고문을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동안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어떤 도구에 착안한 것인가? 신작에 대한 소개 부탁한다. <아름다운 도구들>은 2009년부터 제작해온 고문을 모티프로 한 시리즈 작업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고문의 방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감정이나 상황, 의미들을 한 지점에 교차시키는 시도들을 해왔다. 신작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은 5년 전 구상한 작업인데 당시 준비하던 개인전에서 예산 문제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작가상 같은 기회가 주어져 예산과 공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드로잉으로만 남았을 작업이다. 전시장 중앙에는 종교적 성소 같은 흰색의 원형 천막이 설치되고 내부에는 ‘아름다운 도구들3-브레이킹 휠’이 배치되며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Breaking wheel’은 중세의 대표적 고문 도구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당시 죄수를 마차 바퀴에 묶어 원 밖으로 나온 신체를 절단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는 고문을 했는데 기구의 특성보다는 바퀴라는 일상적 사물이 신체를 재단하는 도구로 탈바꿈되는 상황에 공포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 사용된 마차, 전차의 바퀴들을 수집해 높이 2.5m의 새로운 기구 12개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바퀴에 새의 털이 달려있고 구조물에 올라가 바퀴를 굴리면 바퀴둘레에 장식된 깃털이 퍼포머의 음부를 스치게 고안 되었다.
육중한 무게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기구 위의 여성들은 힘을 내기 위한 노동요를 부른다. 바퀴를 힘껏 굴려 속도가 높아질수록 육체적 노동은 심해지나 육체를 둘러싼 성적욕망은 실현된다. 개막일에 여성들이 고통과 쾌락의 지점을 오가며 바퀴를 굴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12개의 기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서로가 확인하고 노래로 응원하며 공유하는 일탈의 장을 만들고자 했다.
개막식날 선보인 퍼포먼스에 대해서 말해달라. 퍼포머들이 부르는 노래도 인상적이다. 퍼포머들은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전해오는 디딜방아 노동요의 가사에 교회에서 탐욕적 음계라며 금지했던 화성법으로 작곡된 그레고리안 방식의 성가를 붙여 부르며 노동의 고통과 성적 환희의 순간을 공유하게 된다. 12명의 퍼포머는 중세 갑옷 속에 입은 철망의 조직모양대로 짜여진 니트를 입고 시골 처녀, 성녀, 요부의 캐릭터를 섞어 놓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돌림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방아를 찧을 때 부르는 노동요로 바퀴를 굴리는 행위나 방아를 찧는 행위적 유사함 외에도 상황에 의해 가사가 은유적인 성적 메타포를 갖게 된다. 이 돌림노래는 바퀴를 천천히 굴리는 걸로 시작해 마지막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단계에선 바퀴를 굴리는 속도와 노래를 부르는 속도가 최대치로 빨라져 퍼포머들의 숨이 차오고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다 해체되어버리는 순간까지 몰고 가고자 했다.
데뷔작이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2000)이다. ‘몸’의 문제가 문화적이라면, ‘신체’는 보다 구체적인 감각의 영역인 것 같다. 이에 대해 설명 부탁한다. 경계로 구분된 감각보다는 감각을 넘어서서 서로 다른 오감이 동원되거나 혼용되는 상태로 문화, 체계, 정치, 규율, 관습, 전통 등을 드러내거나 신체적 감각과 상반된 감정이 중첩된 상태로 현실을 은유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2004년부터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액체들, 침, 오줌, 피 등에 관심을 가졌다. 신체의 분비물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액체분비물은 각 기관을 통해 나온 수분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다른 이름과 기능, 그리고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감정들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들 모두 얇은 막(피부)을 벗어나면 그 순간 다른 가치가 부여되고 만다. 땀이 가지고 있는 시큼함과 에로틱함, 눈물의 짠맛과 슬픔, 환희. 침의 거품과 질긴 장력, 게걸스러움 이런 것들이다. 그것은 아브젝트적(abject) 성격의 무의미함, 버려지는 것들, 기피대상 등의 개념을 넘어 하드하고 치밀한 모든 조직을 흔들어 놓는 유동적인 파장으로 작업에 등장하길 바란다.
작업에 등장하는 아브젝트적 요소들은 사적이고 미시적인 결과물, 행위들 안에 등장하면서 오히려 위기의 요소로, 스펙터클한 상황으로, 관객들 경험의 확장된 순간으로 전복된 위치를 가지길 원한다.
미술에서 경쟁과 상이라는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술에 대한 하이어라키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인 것 같다. 그렇다면 yes. 하지만 하이어라키의 계층구조가 어떠한 모양새인지 알 수 없다. 다들 동의하는 같은 내용도 아닐테고, 그것이 피라미드인지, 고정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것들이 그 모양새를 움직이는지 미술제도 안의 구성만이 아닌 변화무쌍한 디테일이 개입하는 것.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첨예하게 미술이, 작품이, 현 시점의 화두가 다시금 언급되는 것이 미술제도의 상이 가진 순기능이고 그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다. 작업에서 경쟁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밖에서 볼 때는 치열한 경쟁으로 진행될 것 같지만 정작 작가는 본인의 작업을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녹초가 된 상태라 다른 작가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 불필요한 소모가 작업을 좋게 한다면야 얼마든지 하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쉬겠다는 결심이다. 내 몸에 대해 참 모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3년정도 제대로 쉬질 못했다. 몸이 약해지니 이상한 불안증이 생긴다. 신작으로 준비하는 전시가 올해 하반기에 열릴 예정이고 다음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전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할 것인지 정하지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체화하고 있다.

장지아는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추계예대 동양화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대안공간 루프, 갤러리 정미소, 가인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아르코미술관, ZKM 미디어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