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남춘모

작가 남춘모는 선 그 자체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을 펼쳐왔다. 캔버스에 입체적인 선을 구현해 회화에 깊이 있는 리듬감을 부여하고, 점과 선을 입체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 쾰른과 한국 청도에 각각 작업실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는 작가는 최근 리안갤러리 서울(5.7~6.20)을 비롯해 독일 갤러리 2곳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개최한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한국적 손맛을 보여준 남춘모의 작품세계를 주목해본다.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1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관특별전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제3의 ‘질(質)을 향하여

윤진섭 미술비평,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바야흐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가 세계 미술계에 입성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Frieze》는 필자를 포함, 미시건 대학의 조앤기 교수, 작년에 단색화전을 기획한 바 있는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 갤러리의 공동 큐레이터인 샘과 틸(Sam & Till)의 논고가 실린 라운드 테이블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발행되는 중화권의 대표적인 미술잡지 《뎬짱(典藏:ARTCO)》은 단색화에 대한 필자의 글을 싣고 곁들여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소개했다. 이 일련의 보도는 지난해 미국에서 발행되는 《Art Asia Pacific》의 단색화 특집에 이은 것으로 단색화에 대한 해외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해외 미술언론의 이처럼 높은 관심과 열띤 취재 경쟁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색화에 관한 국내 미술계의 태도이다. 단언하자면 현재 몇몇 화랑이 주도하는 단색화 붐은 그 초점이 주로 판매에만 국한돼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는 일본의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파인 ‘구타이 그룹’과 ‘모노파’가 세계미술사에 등재된 사실에 비춰볼 때, 한국의 단색화가 용의주도하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등재 자체가 자칫 좌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단색화에 대한 이론적 조명과 판매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단색화의 조명이 김기린,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창섭, 하종현 등 주로 전기 단색화 작가들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국내의 메이저 화랑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이러한 편향적 움직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색화의 행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즉, 현재 한국의 미술계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후기 단색화 작가들의 활동에 대한 무관심은 모처럼 찾아온 단색화 열풍을 식혀 말 그대로 한때의 바람으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계승과 심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랑계의 관심과 더불어 단색화에 대한 비평계와 미술사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남춘모는 후기 단색화 작가군에서 대표적인 작가이다. 필자는 이미 수차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글을 쓴 바 있기 때문에 이번 논고에서는 그의 줄 이랑 작품의 의미를 소개하고 글의 후반부에서 작업의 방향을 대폭 전환한 근작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남춘모는 19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나가는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작업은 입체회화 내지는 부조회화라는 측면에서 방법적으로 여타의 작가들과 차별화된다. ‘ㄷ’자 형태의 나무틀에 천을 감싸 마치 주조하듯이 제작되는 남춘모의 작품은 가히 ‘부조 회화’라고 부를 만하다. 그것은 일정한 패턴과 골격을 지닌다. 캔버스의 프레임에 평행을 이루는 작품의 세로형 이랑들은 캔버스의 표면으로부터 도드라짐으로써 그림자를 생성한다. 2차원 평면을 부정하고 3차원 공간으로 촉수를 뻗는 이러한 형태의 작업 선례는 프랭크 스텔라의 릴리프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남춘모의 경우는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몸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집중적인 미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변형 캔버스 작품이 캔버스의 프레임을 따라 일정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나간 반면(“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Frank Stella)), 남춘모는 그러한 회화적 관례와는 별개의 선상에서 유미적(aesthetic)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인과 동양인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 관습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2012년 <한국의 단색화전>(국립현대미술관)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한 《Art in America》의 편집장 리처드 바인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당시 발제에 나선 리처드 바인은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이 왜 이렇게 한결같이 아름다운가”고 질문을 던진 뒤, 이는 실험을 중시하는 서구 아방가르드 전통에 비춰볼 때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평자들 간의 상이한 견해의 차이는 과연 어느 지점에서 화해를 이룰 것인가?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2014년 부산 갤러리 604에서 열린 개인전 광경

물질과 마음이 맞닿은 어느 지점
필자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단색화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바로 이러한 화해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도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의 저자인 로버트 M. 피어시그의 관점을 주목한다. 동양의 ‘미학적 요소(낭만적 유형)’와 서양의 ‘이론적 요소(고전적 유형)’, 소위 ‘합리적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극복하고 이를 통합할 수 있는 제3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논의의 중요한 근거로 과거에 한국에서 본 성벽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 본 성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것이 기술공학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벽을 쌓은 사람들의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즉, 한국인의 ‘자기 초월의 마음 상태’와 그것을 유도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그 원인으로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남춘모의 부조회화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 사이의 차이점도 바로 이러한 동서양 간 사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곧 삶의 태도에서 빚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작화(作畵)를 둘러싼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남춘모의 캔버스 속 이랑들은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줄무늬 회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남춘모 작품의 날 선 이랑들은 마치 한국의 성벽을 구성하는 돌들이 푸근한 느낌을 주듯이, 천의 보푸라기들이 느껴질 만큼 불규칙적이며 푸근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 작품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특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한국의 단색화에 내재된 어떤 특수한 ‘미적 질’이다.
남춘모는 최근에 단색의 원형과 줄 오브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는 그가 1990년대 이후 오랜 기간 추구해 온 줄 이랑 작품에서 벗어나 일련의 수제(手製) 오브제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파편화된 사각 입방체의 조합 이후에 변모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일단 캔버스 프레임을 떠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남춘모가 시도하는 오브제 작품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형의 것으로 이는 레진에 돌가루를 섞은 것이고, 로프를 연상시키는 오브제 작품은 굵은 철사에 석고가루를 천에 묻혀 바른 후 색을 입힌 것이다. 색은 청색, 적색, 흰색 등 극히 제한돼 있다.
원형의 작품이건 로프형의 작품이건 공통점은 기존의 남춘모 작품이 그렇듯이 모서리 부분이 정밀한 마감질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들에서도 역시 약간 거친 듯한 표면 질감이 두드러진다. 원형 또한 표면이 매끄러운 완벽한 원이 아니라 재료의 물질감이 돋보이는 거친 표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원반의 가장자리 또한 울퉁불퉁하게 조성돼 있다. 이 점은 로프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특징이다. 특히 로프 작업은 마치 로프를 둘둘 말아 벽에 걸어놓은 것처럼 우리 눈에 익숙한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은 필경 우리의 삶 속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이 작업이 끝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서양의 미니멀 작가들, 가령 프랭크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는 끝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작도된 선을 따라 물감이 묻은 붓으로 칠할 때 칠을 다하면 끝이 난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남춘모의 작업의 끝은 물질과 마음이 맞닿게 될 시간의 어느 지점이다. 작가는 그 시간의 끝을 미리 추측할 수 없고 일과 정신이 만족할 만한 합일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끝이 난다. 또한 이는 전기 단색화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특징이기도 하다.
로프를 연상시키는 남춘모의 작품은 플라스틱 파이프의 기계적이며 매끄러운 표면질감과는 판이한 느낌을 준다. 자세히 보면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 질감을 지닌 그것은 마치 탯줄처럼 자연의 상태에 가깝다. 그것은 자연을 지향하는 행위, 즉 자연을 향한 ‘마음’의 작용의 발로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이 질료에 옮겨 붙어 물질도 정신도 아닌, 피어시그의 용어를 빌리면 제3의 ‘질’을 지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뜻 보면 남춘모의 작업은 한국 고유의 ‘대충주의’ 내지는 ‘적당주의’의 산물 같다. 한국인 특유의 독자적인 심성을 배태한 이 특유의 행동에는 그러나 그 속에 자연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남춘모는 왜 원반의 끝을 매끄러운 기계적 선으로 마감하지 않았는가? 왜 로프의 표면을 말끔하게 다듬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이것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가 일어났다고 본다. 합리적 이성과 동양적 직관 사이의 갈등을 넘어 양자를 통합하려는 미학적 의지가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댔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피어스그가 언급한 것처럼 ‘자기 초월의 마음의 상태’가 질료에 육화돼 나타난 모습 그대로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춘모의 작업에서 미래 한국 미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에 출품된 남춘모의 작품

남 춘 모 Nam Tchunmo
1961년 출생했다. 계명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대구 예맥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9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청도와 독일 쾰른을 오가며 활발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 독일 본 갤러리 쿤스트라움21(4.17~5.29)과 베를린 안도 파인아트(4.30~6.19)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