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512 Hours>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를 어떤 작가로 정의해야 할까? 퍼포먼스 아트의 대모? 전위의 여전사? 특정한 정의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그녀의 작업세계는 극적이다. 그녀의 새로운 퍼포먼스 <512 Hours>(6.11~8.25)가 실연된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앞은 그녀와 함께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싶은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이 퍼포먼스에 직접 참여한 본지 통신원의 전언을 싣는다.
지가은 골드스미스 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올해 68세를 맞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런던 서펜타인갤러리의 아담한 전시 공간에서 관객들을 맞이한다. 작가는 62일 동안 갤러리가 오픈하는 주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512시간 동안 오로지 작가 자신과 관객이 만들어가는 퍼포먼스를 마련했다. 직접 갤러리의 문을 열고 밖에 길게 줄지어 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벼운 아침 인사와 악수로 환대한다. ‘빈 몸으로 오라’는 작가의 요구에 따라 관객은 가방, 시계, 휴대전화, 카메라 등 모든 소지품을 전시장 밖에 내려놓아야만 그녀가 준비한 ‘빈 공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입구에서 건네 받은 헤드폰을 쓰면 주변의 소리가 차단된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눈감은 채 앉아 있거나 벽을 보고 서서 부동자세이다. 더러는 눈을 가리고 한걸음씩 천천히 내디디며 소리와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한 채 갤러리 공간을 보행 중이다. 모든 것이 슬로 모션이다. 마치 엄숙한 제의에 참여하듯 관객들은 진지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관객들은 아브라모비치가 지시한 미션을 수행 중이다. 갤러리 안에는 몇 가지 소품이 준비되어 있지만 미리 정해진 계획이나 스크립트는 없다. 작가는 이제 막 이 의식에 참여해 방황하는 낯선 관객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치고, 손을 이끌어 데려간 곳에서 귓속말을 속삭인다. 발을 맞추어 걷기도 하고, 등에 손을 가만히 얹고 체온을 느끼며 함께 한참을 서있기도 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관객을 이끄는 안내자 퍼포머들도 이에 동참한다. 이들은 의자에 앉아 있던 관객의 손을 붙잡고 중앙에 자리한 낮은 단상 위에 올라 서서 함께 명상을 하기도 하고, 간이침대들이 마련된 방으로 데려가 이불을 덮어주며 편히 쉬라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관객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행위에 몰입할 수 있다.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르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걷고, 서고, 앉고, 자고, 생각하는 평범한 행위와 일상이 이 안에서는 중차대한 임무가 된다. 모든 디지털 기기와 시계마저 반납하고 시간 감각을 잊은 채 반복적으로 자신의 몸짓과 공간 속에 몰입해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훈련이 필요하며 계기가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는 참여자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기를 독려하는 작가의 메시지와 의지가 담겨있다. 퍼포머와 관객의 친밀한 관계와 교감을 바탕으로 하는 512시간의 여정을 통해 아브라모비치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안내자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다. 그녀가 참여한 개개인의 내면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퍼포먼스아트의 대모’라 불리는 아브라모비치의 1970년대 초기 퍼포먼스는 꽤나 과격했다. 퍼포머와 관객의 관계 탐색도 지금보다 훨씬 과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초기작으로는 <리듬 0(Rhythm 0)>(1974)이 있다. 관객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빗, 음식, 총, 장미, 채찍, 립스틱과 같은 72개의 각기 다른 물건을 자유자재로 작가의 몸에 사용할 수 있고, 작가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6시간 동안 관객에게 몸을 내맡겼다. 처음엔 머뭇거리며 행동을 주저하던 관객들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과감해졌다. 옷을 벗기는가 하면 장미 가시로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적극적으로 행위에 가담했고, 급기야 한 관객은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기도 했다. 아브라모비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고 신체적 취약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해왔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신체 자체가 도구이자 매체이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연결 통로가 되었다. 이에 관객들을 목격자로, 행위자로 참여시켜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소리 지르기, 고통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기, 몸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극도로 흥분하게 만드는 향정신성 약제 투여하기 등 때로는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학적인 퍼포먼스도 서슴지 않았다. 작가는 이러한 고통의 감내에 대해 신체적 한계 너머에 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다른 차원의 자신과 그 내면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에는 아브라모비치의 어린 시절 기억과 문화적 뿌리가 깊게 자리한다. 1946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Belgrade) 태생인 아브라모비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르티잔(Partisan) (일명 빨치산)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건국에 앞장선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유고연방의 티토(Josip Broz Tito) 대통령 정부에서 요직에 오른 부모님 덕에 유복했지만, 공산주의와 동방정교회 전통의 엄격한 생활방식과 어머니의 강박적인 훈육 방식으로 억압된 유년기를 보냈다. 유고연방이 붕괴된 이후에도 발칸반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이념의 혼재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크로아티아 전쟁(1991-1995), 보스니아 내전(1992-1995), 코소보 사태(1993-1999)를 겪으면서 여러 민족국가로 분리되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조국의 내란과 민족분열, 전쟁과 학살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목격하면서 폭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몸으로 치열하게 표현하는 제의적이고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몰입하게 된다. <토마스의 입술(Lips of Thomas)>(1975/2005)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상징인 붉은 별을 자신의 배 위에 한 줄씩 면도날로 새겨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며 얼음으로 된 십자가 위에 알몸으로 누워 고통을 견뎌내다가 얼어붙은 자신의 등에 사정없이 채찍을 내려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자행한 일에 대한 처절한 책임 의식을 지고 단죄를 거행하는 여전사이다. 같은 맥락에서 <발칸 바로크(Balkan Baroque)>(1997)에서는 소뼈 더미 위에 앉아 유고슬라비아 민요를 부르며 4일 6시간씩 피를 닦아냈다. 이 퍼포먼스로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깨어있는 한 개인이자 예술가의 목소리와 역할이 어떻게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하는지, 또 어떻게 타인의 의식에 강렬한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의 의식과 내면을 깨우다
아브라모비치는 신체적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는 극단적인 퍼포먼스에서 점차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성과 지속성, 여기에 참여하는 관객들과 맺는 관계의 과정에 더 집중하게 된다. 부드럽고 조용하지만 힘있고 따뜻하게 관객과 교류하고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2010년 뉴욕 모마(MOMA)에서 열린 회고전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The Artist is Present)>에서 아브라모비치가 보여준 소통의 방식이다. 하루 8시간씩 총 736시간 동안 침묵 속에 관객과 마주 앉아 눈빛으로만 소통하는 퍼포먼스에 뉴욕 시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전시 기간 누적 관객 850만 명이 다녀갔다. 긴 기다림 끝에 그녀 앞에 앉은 사람들은 생전 처음 만나는 한 예술가에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기도 했다. 작가는 그저 아무 말없이 이를 들어주고 눈빛으로 화답할뿐이다. 조건 없는 만남이고 응시이고 경청이다. 관객들은 역시나 자신이 원하는 시간만큼 작가와 침묵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그녀의 눈빛과 에너지 앞에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것일까. 아브라모비치의 옛 연인이자 동료인 울라이(Ulay)의 깜짝 등장으로 퍼포먼스의 여운은 더 진하게 남았다. 울라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서독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우베 라이지펜(Frank Uwe Laysiepen)과 아브라모비치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다른 사람들(the others)’이라는 그룹명으로 활동하면서 공동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둘은 12년간의 공동 행보를 뒤로하고, 90일 동안 중국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걸어와 중간에서 만나 포옹하고 각자의 길을 떠나는 퍼포먼스 <연인들(The Lovers)>을 끝으로 이별했다. 모마에서 두 사람은 30년 만에 재회한 것이다. 퍼포먼스 내내 담담했던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테이블 위에서 울라이와 손을 맞잡았다. 1분 남짓한 이 장면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모마에서의 퍼포먼스는 얼마나 많은 이가 이런 애정어린 응시와 공감을 원하는지를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후 3년 만에 런던에서 열린 <512시간전>은 어떠한 방해 요소없이 가장 간결한 환경에서 관객과 조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에너지의 상호 전이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지난 25년간 자신의 퍼포먼스들이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표현했다. 그간의 퍼포먼스들과는 달리, 매순간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512시간>의 대장정은 시간의 흐름을 시계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면서 점진적으로 지금, 여기 나의 의식의 세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 ‘가득 찬 빈 공간’에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에너지를 스스로의 몸짓으로 일깨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물론 내면의 반항이 뒤따른다. 필자 역시 첫 방문에는 도무지 이 상황 자체에 녹아들기가 어려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시늉만 하다가 어색한 몸사위와 더딘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일찍 자리를 피했다. 다시 찾아간 두 번째 방문에서는 갤러리로 이르는 길에서부터,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에도 자발적인 참여자가 될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작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묵직한 존재감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었다가도 이내 온기 찬 진심을 전달 받았다. 차차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공간의 기류를 나누고 있다는 촉각, 후각적 교감이 일어나고, 타인을 의식하는 단계를 지나면 오롯이 내 자신과 시간의 흐름만이 남는다. 기다림의 시간과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퍼포먼스의 일부가 된다.
스마트폰, SNS와 메신저가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는 현대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이다. 타인과 직접적인 촉감 소통을 하거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무관심한 ‘공감’ 능력 상실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자폐적 소통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목적과 명분을 잃어버린 전쟁과 인종갈등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재난의 뒤편에 드리워진 무력감의 생채기도 현재진행중이다. 아브라모비치는 개개인의 의식과 내면이 깨어있는 순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호탄이자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의식들의 상호 연대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공감이 일어나고 소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상황을 방관하는 관찰자가 될 것인가 변화를 주도하는 참여자가 될 것인가는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고 자각이다. <512시간>에서 그녀가 관객과 함께 이루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의 정신을 끊임없이 단련해가는 내면의 회복이고, 공감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