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문성식 얄궂은 세계
두산갤러리 3.9~4.2
정신영 서울대학교 미술관 책임학예연구사
전시장에서 4m가 넘는 구상 회화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문성식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숲의 내부>(2015~2016), <밤>(2015~2016)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는 획들로 나뭇가지, 나뭇잎을 묘사하여 숲의 파노라마를 펼쳐가는 대형 세밀화 양식은 무엇보다 그 노동집약성에 감복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의 작은 세로형 인터페이스를 일일 평균 3시간 이상 쳐다본다는 우리의 시각 활동을 생각할 때 이 대형 화면은 쉽게 일망(一望)되지 않는다. 숲 속에 그려진 동물이나 사냥꾼을 발견하면 스마트폰으로 찍기에 바쁜 관객들의 반응처럼 모처럼의 넓은 화면은 환경이나 공간으로서 관객을 에워싸기보다는 파편화된 정보로 접수된다.
몽환적 사건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전 <한여름 밤의 꿈> 처럼, 위의 두 작품에서도 숲을 배경으로 짐승들의 약육강식의 사투와 먹이사슬의 맨 위를 차지하는 인간의 온갖 ‘얄궂은’ 행위들이 자행된다. 숲 속 나무 사이사이에 서로를 뜯어먹는 짐승들의 무리나 멀리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냥꾼의 모습, 캔버스 상단에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공중 무용수처럼 나무에 목매단 자살자의 다리가 걸쳐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마치 부활절 달걀 찾기처럼 있을 법한 곳에 기대했던 것이 숨어 있는 기시감이 있어 다소의 진부하다.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얄궂음’의 기호들이다.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관심은 대담한 흑백 드로잉 시리즈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남녀가 사랑하고 싸우고 늙어 죽어가는 일장 드라마가 마치 현대판 십계를 보는 것처럼 미묘한 불편함을 주는 것은 표현의 지나친 솔직함 때문만은 아니고, 마치 우리가 이들의 슬픔과 늙음, 욕정과 분노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윤리적 책임마저 떠안고 설교당하는 듯한 동질감에 말미암은 것 같다.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2013)는 목각인형처럼 작고 경직된 어머니와 그녀를 무릎에 얹은 노년의 아들과의 역-피에타이다.
한 획, 한 획 붓으로 짜 엮은 듯이 흑백의 농담 차이만으로 그린 이 작품은 시간의 공포와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생의 기원인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담아 그 어느 누구도 편하게 쳐다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유난히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있다.
그중 <사람. 눈물. 파리.>(2015~2016)로 불리는 4명의 초상화 연작에서는 눈을 감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중년이나 얼굴을 손으로 에워싼 여인, 눈감고 누운 노인의 눈초리에서 눈물이 막 떨어지는 모습 등 표준적 일상에서는 익숙지 않은 장면들이 담겨있다. 이 어른들의 표현 역시 세밀화적으로, 구슬처럼 흐르는 눈물은 물론 피부의 질감이나 주름, 기미나 실핏줄까지 비춰, 그 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게 되는 대형작품보다도 화면을 쳐다보는 재미가 있다. 극사실적인 표면처리에 비해, 인물의 이목구비나 골격의 표현에는 위의 드로잉과 같은 캐리커처적 왜곡이나 형상의 추상화가 약하게 남아있어 실존하는 인물의 모습이기보다는 캐릭터화된 존재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초상에는 파리가 한 마리씩 붙어 있는데, 정물화에 그려 넣어진 파리라면 꽃이나 과일들의 유혹하는 달콤한 향을 떠올리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부패가 진행됨을 상징할 법한데, 인물에 얹혀진 파리들은 다시 한 번 이들이 회화적 존재이며, 이들의 슬픔도 수사(修辭)적 차원임을 상기시킨다. 대형회화에서부터 흑백 드로잉, 그리고 갤러리 밖에 걸린 굵은 먹선의 누드 크로키들까지 작가의 매체에 대한 감수성과 순발력, 동시에 다양한 회화적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느끼게 한다.
위 문성식 <사람. 눈물. 파리.> 캔버스에 아크릴 2015~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