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전시]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contents 2014.2. exhibition topic | 애니미즘들을 다시 움직이기 | |||||||
50여 점의 필름, 비디오 및 각종 사진과 회화자료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그룹전 <애니미즘전>의 테마는 제목이 시사하듯 ‘움직임’이다. 처음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은 민속학과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이 뜻하는 움직임, 즉 자연과 문명의 사물들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애니미즘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기법에 착안해보면 운동의 외연은 확장된다. 사물과 인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운동은 재현되고 나아가 생산된다. 시각매체의 역사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운동을 가시화하고, 정지된 것에 운동을 불어넣은 과정들의 역사다. 이렇게 보면 ‘애니메이션’은 셀(cel)이나 인형 등의 재료에 근거한 특정한 무빙 이미지 예술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선다. 대신 ‘애니메이션’은 움직임에 매혹되어 그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회화와 사진의 기법들, 기계적 자동장치를 이용해 정지 이미지를 운동의 환영으로 변환시키는 영화의 본성, 그리고 전자적 신호와 컴퓨터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자동장치들이 생산하는 포스트-영화시대의 다양한 운동들을 포괄한다. <애니미즘전>은 이러한 미디어들을 아우르는 운동의 역사에 대한 조망이다. 나아가 이 전시는 이러한 운동들이 서구적 근대성의 다양한 국면과 맺어 온 관계의 계보들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한다. 그 관계들이란 근대성이 형성하고 지탱해 온 다양한 구분을 말한다. 식민주의와 과학적 이성의 양날개를 달고 비행한 서구적 근대성은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야만, 이성과 맹신 사이에 명징한 경계선을 그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디어 이미지들이 구현해 온 애니미즘은 19세기 이후 사회와 주체성의 생산을 지탱해 온 이러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문제 삼는다. <애니미즘전>은 애니미즘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전시다. 기획자인 안젤름 프랑케가 말하듯 이는 “애니미즘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이자 이를 파괴하기 위한 전시다.” 비록 프랑케가 “이 전시는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 형태들로 표현된 애니미즘에 대한 것이며 민속학이나 신화학에서 말하는 애니미즘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전시 관람자들을 일차적으로 유인하는 작품들은 마술적 믿음, 토착적 신앙,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문화, 영혼이 스며든 사물,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 세계관이 전근대적인 것의 이름으로 배제하거나 대상화한 타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애니미즘은 근대성의 이원론적 위계들이 설정한 타자들의 귀환이다. 시 각미디어는 이러한 귀환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각미디어가 세계와 주체 사이에 자리 잡으며 운동을 생산할 때, 그 운동은 주체와 객체, 영혼과 사물, 자연과 문명의 은밀한 소통 그 자체를 체현하는 매개물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Medium이라는 단어는 ‘매체’와 ‘영매’를 모두 뜻한다). 이에 화답하듯 <애니미즘전>의 몇몇 작품은 애니미즘적 주체와 인식, 현상들을 전근대적 타자들로 규정하는 근대적 지식과 지각의 체계를 노출하거나, 그러한 체계를 넘어서 애니미즘의 역동성을 담아내고 탐구하기 위한 시각미디어의 대안적 사용법들(즉 시각미디어를 일종의 영매처럼 활용하는 방법들)을 보여준다. 수잔 슈플리의 <태양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Can the Sun Lie?,2013)>는 태양의 위치 변화와 기후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에스키 모들의 세계관이 지구온난화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체계에서 기각되는 과정을 민속지적 영상과 디지털 데이터 영상, 사진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다층적으로 분석한 에세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다양한 양식들은 타자성의 불가해한 매혹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돼왔다. 범신론적 믿음이 지배하는 나바호족의 세계를 포착한 <용감무쌍한 그림자들 (Intrepid Shadows, 알 클라(Al Clah), 1966/69)>에서 자유분방하게 가속화된 탈중심적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무생물(정체불명의 금속 고리)을 활성화시키는 과정 자체를 체현함으로써 민속학적 다큐멘터리의 관찰자적 거리두기를 극복한다. 자크라왈 닐탐롱(Jakrawal Nilthamrong)의 <비현실의 숲(Unreal Forest, 2010)> 은 잠비아 현지 제작진과 함께 한 제작 과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반영적 양식을 통해 영적 세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연장시킨다. 다큐멘터리 양식들의 반대편에는 애니미즘의 역량을 빌려 이미지와 시각적 지각의 경계를 확장한 실험영화들이 있다.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 인물인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는 16mm영화 <쿠사마의 자 기-삭제(Kusama’s Self-Obliteration, 1967)>에서 불연속적 편집과 자유분방한 카메라워크를 통해 일본 전통신앙의 정령적 존재와 서구 사이키델릭 문화 사이의 현란한 소통을 추구한다. 서구적 정신주의와 토착적 애니미즘 사이의 결연은 초기 수작업 추상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렌 라이(Len Lye)에게서도 드러난다. 그의 첫 작품 <투살리바(Tusaliva, 1929)>는 추상회화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사모아족의 원시적 형상들로 역동적으로 변형시키는 자동기법(automatism) 의 모범 사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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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영상,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 | |||||||
애니미즘을 다루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은 시각미디어 자체를 구성하는 유령성(spectrality)의 존재를 암시한다. 사진과 영화가 특히 유령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듯 사진이 관람자의 감각에 호소하는 내밀한 지점은 과거에 존재했으나 현재는 부재한 대상과 사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리고 현전과 부재가 공존하는) 과거의 흔적이 가진 유령성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차원을 얻는다. 영화 이미지의 자동운동은 셀룰로이드를 이루는 무수한 프레임 사이의 빈 공간, 그리고 프레임이 본원적으로 가진 사진적 이미지의 정지 상태에서 비롯된 환영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진과 영화는 자크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말한 유령의 논리, “볼 수 있 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초과하는” 유령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습득영상(found footage) 제작은 바로 이러한 사진과 영화의 유령성을 탐구한다.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의 전유와 변형, 재배열로 이루어진 작품을 뜻하는 습득영상은 2차대전 후 실험영화를 통해 풍부히 발전했으며 1990년대 이후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cinematic video installation)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앗다. 습득영상 제작에서 사진적 이미지의 유령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일종의 비정상적 운동들, 정지와 감속의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지속적으로 교체되는 영화 이미지의 흐름들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형식적, 수사적 전략들을 드러내고 이미 지에 기입된 과거의 흔적들을 관람자의 현재에 강렬하게 남기기 때 문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습득영상 실험영화를 지속적으로 탐구 해 온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자본주의: 노예(Capitalism:Slavery, 2007)>는 19세기 미국 목화농장 노동자들의 입체사진 이미지를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한다. 미세하게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번갈아 보여주는 디지털 자동기법은 원래의 입체사진이 잠재적인 수준으로 나타냈던 3차원적 몰입의 황홀경을 현실화한다. 이 황홀경의 환영적인 면모는 이미지들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플리커 효과(flicker effect)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적인 충동은 식민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육체에 부과한 피로의 제스처들을 강렬하게 확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노예>에서 정지를 수반한 역설적인 애니미즘은 이탈리아 습득영상 제작의 거장들인 여반트 기니키안과 안젤라 리치 루치(Yervant Gianikian & Angela Ricci Lucchi) 가 사용하는 감속의 기법과 호응한다. <다이아나의 거울(Diana’s Looking Glass, 1996)>은 로마 남부의 신비스러운 한 호수가 무솔리니의 제국주의적 파시즘에 의해 개발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영상들을 소재로 삼는다. 호수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된 로마 시기의 거대한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동원된 노동자들의 지친 눈빛과 몸짓들은 슬로 모션으로 관람자에게 다가온다. 이 두 편의 습득영상 작품은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의 인식과 만나는 깨달음의 불꽃을 지피고 사진적 이미지의 본원적인 유령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존의 이미지들에 새로운 운동을 부여한다. 여기서 애니미즘은 다시 움직인다(re-animated). 시각미디어가 근대 이후부터 구현한 다양한 형태의 애니미즘들 은 주체의 경험과 정서, 사유를 재현하고 조직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기술이 근대성의 지식체계 및 제도들이 이루는 네트워크 내에서 작동해왔음을 말해준다. 전시의 참고자료로 제시된 샤르코의 히스테리 환자들에 대한 사진, 메스머의 전기최면 시술에 대한 드로잉, 그리고 에티인 쥘르-마레가 움직이는 물체와 활동하는 육체의 운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개발한 연속사진(chronophotography)은 시각미디어들이 인간의 지각과 생리적, 심리적 과정들을 형성한 사회적 장치(apparatus)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 모든 사례에서 운동은 주체의 내적 자아 안에 있는 불가해한 신경생리적 차원과 무의식의 지대들을 가시화하고(샤르코, 메스머), 주체의 외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석하는 데 복무했기 때문이다 (마레). 사진과 영화에 드러나는 다양한 애니미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생체권력(biopower)의 작동양식은 전자적 신호, 컴퓨터 재현체계 및 인터페이스가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r)을 활성화함으로써 사용자의 지각과 정서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경관에도 적용된다(그래서 이 전시에 비물질노동 개념을 제안한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Maurizio Lazzarato)가 참여한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전시장의 3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개의 작품은 미디어 애니미즘이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증들을 펼치는 비디오 에세이의 형태를 취한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평행(Parallel, 2012)>은 오늘날 현실을 사진적 이미지와 가깝게 시뮬레이션하는 컴퓨터 게임의 풍경 이미지들(바람, 바다, 나무)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카메라의 기록에 근거한 영화적 풍경의 이미지들과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 전략을 통해 파로키는 컴퓨터 이미지의 하이퍼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두 가지 방식으로 유도한다. 하나는 컴퓨터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추상화된 수학적 기호들의 알고리즘적 연산에 근거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컴퓨터 이미지는 아무리 모방적이라도 물리적 현실로부터 일정 부분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재현과 시각적 인식에 대한 비판적인 계보학적 탐색은 톰 홀러트(Tom Holert)의 <광택의 노동(The Labours of Shine, 2012)>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대중영화의 매혹적인 스타 이미지와 광택을 내는 구두닦이의 노동 과정에 대한 습득영상, 그리고 브랑쿠시의 광나는 청동 조각상을 병치시킨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예술과 노동, 대중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광택이 가진 의미에서 찾아낸다. 광택은 빛의 물리학을 넘어 일상적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변환시키고, 재화에 교환가치를 부여하며, 이미지에 물신적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미학적, 정치적 현상인 것이다. 이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채택하는 2채널 비디오는 시간적인 순차성에 근거한 영화적 몽타주를 공간적인 동시성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공간적 몽타주는 멀리 떨어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맥락과 의미망에 배치한다는 점에서 다시 움직이기(re-animation)의 또 다른 양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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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아비카이넨 <천연자원 관리국의 범죄현장 조사서>(오른쪽) 2013과 임흥순 〈비념〉(왼쪽)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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