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한국화의 반란
contents 2014.2. review | 한국화의 반란 |
위·이동협 <닮아도>(사진 오른쪽) 종이에 먹, 물감 33×25cm(각) 2005
아래·진현미 <겹-0103>(사진 앞) 투명필름, 한지에 먹 400×320×300cm 2012 안국주 <우리 엄마는 어디있어? 8>(사진 맨 왼쪽) 혼합재료 130×194cm 2013 사진・박홍순 |
‘한국화의 반란’이라는 자극적 제목만큼이나 놀라움을 주는 것은 미술관이 들어선 노원구 중계동의 풍경이다. 그곳은 아파트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파트만으로 이루어진 동네 같았다. 도미노 게임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시멘트 블록은 진정 ‘현대적’ 도시 그 자체로 다가온다. 아파트 사이로 물질적, 정신적 차원의 대량 소비를 소화할 수 있는 대형 마트들과 극장들이 보이고, 고층 건물이 품고 있는 작은 공원 속에 자리한 미술관은 무슨 전시를 해도 최소한의 흥행은 보장받을 것 같은 흐뭇한 믿음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예술의 전반적인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문화 향수권 확대라는 계몽주의적 모토로 탄생한 근대적 제도가 예술의 힘을 사회에 알리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나 현재의 자리(place)인 땅보다 미래의 공간(space)인 허공에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칸막이 쳐진 단편들을 잇는 것은 자연발생적 구조가 아니라 어느 날 동시에 시행된 공시적 구조로서의 산물이다. 현대는 옳고 그름이나 미적 취향의 문제를 떠나 우리의 삶의 구조적 차원에서부터 자리를 잡았다. 미술관을 향해 최소한 몇 분간이라도 걸어가 본 관객은 전통에 관계된다고 믿어지는 한국화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온몸으로 깨달을 것이다. 동시에 체계는 체계 자체를 유지시키려는 관성이 있기에, 대학에 한국화과라는 전공과목이 건재하는 한그 위기라는 것도 때 되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담론 소비의 일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벽지를 닮은 한국적 모더니즘이 미학적이거나 사회적인 담론의 우위 이전에, 막 생겨나기 시작한 아파트의 하얀 벽면들을 채우기에 적절했기에 유예없는 시장의 선점이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한국화 역시 현대에 대한 나름의 상황파악을 통한 특단의 조처가 필요한 것이다. 12명의 젊은 한국화과 출신자가 참여한 이 전시가 ‘반란’에 값하는 도발이나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를 전면적으로 규정짓는 현대의 증후가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 증후 중의 하나가 단편화이다. 완전하다고 믿어지는 원형적(전형적) 모델로서 간주된 전통, 그 유기적 총체성은 해체되었고, 단편들은 결핍 또는 충만의 기호로 나타난다. 여러 방식으로 구현된 30여 점의 작품을 묶어낼 수 있는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은 어떤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단편들이 조합되는 방식을 말한다. 한지 위에 고서 콜라주, 수묵과 아크릴채색으로 그려진 권인경의 풍경화는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것들이 충돌하는 현대의 풍경이다. 짧은 시간 압축 성장한 우리의 근대화는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이질적 코드의 공존을 낳았던 것이다. 입체로 구현된 이정배의 산수는 전통의 바탕인 자연의 현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깊은 뿌리를 가지는 온전한 전체, 또는 본질이 아니라 단편의 조합이다. 사진이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축소된 자연은 탈색되어 있고 잘려나갔으며, 인간이라는 이물질에 의해 오염되고 잠식된다. 어수선하게 가지를 뻗는 식물로 대변되는 빈약한 토양의 산물, 그리고 포획을 위해 걸쳐놓은 막과 망들은 자연을 착취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알려준다. 그러나 단편은 나형민의 풍경에서 천상의 도시 같은 충만함으로 떠오른다. 그는 평범한 동네 한켠을 잘라내 뭉게구름 있는 푸른 하늘 위에 붕 띄워놓았다. 그곳으로부터의 낙하도 아찔하면서 신나는 놀이로 나타난다. 한지에 토분채색으로 담백하게 그려진 그의 풍경에서 단편화는 박탈감보다는 해방감을 낳는다. 근대도시가 소외와 자유를 동시에 낳았듯이 말이다. 전통, 풍경, 인물 등이 짙은 안개 속 모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안국주나 이은실의 작품은 단편화의 이면이다.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편은 수수께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단편의 비의적 속성을 극대화한 그들의 작품은 은은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전통적 산수화에 포함된 이상향적 가치는 단편의 모서리를 최대한 둥글려서 통합된 가상을 창출하려 한다. 일월도처럼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이용석의 풍경은 이국적 동식물로 가득한 이 시대의 이상향이다. 열대의 섬이 떠오르는 풍경은 전통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관광의 산물이다. 관광은 전통뿐 아니라 현대예술을 대체하는 문화소비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수십 장의 겹쳐진 투명 필름으로 만들어진 진현미의 산수풍경은 단편을 전체로 종합하기 위한 장치가 독특하다. 아마도 현대의 대표적인 문화예술로 자리 잡은 시간예술(영화)을 공간화한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일상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기념사진의 틀을 빌린 변윤희의 인물화, 그리고 같은 크기의 화선지에 수백 명의 인물을 그린 이동협의 작품은 시공간의 박편인 사진을 활용한다. 기계로 수집된 박편들은 기계적으로 재배열된다. 단편화된 인간은 사물과 구별되기 힘들다. 서민정은 안팎이 불분명한 공간에 고립된 인간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그린다. 단편화된 인간에게 몸의 온전한 경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요상은 두개골 안에 있어야 할 뇌를 몸 안팎을 넘나드는 머리카락으로 가득 펼쳐놓았다. 중력에 순응하는 검은 선의 다발들이 하얀 벽 위에서 변화무쌍하게 유영하는 권기범의 작품은 단편의 확대를 꾀한다. 그는 바닥에 놓고 그리는 한국화의 전통을 순순히 따르지만,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확장하며 벽체라는 물질과 결합했을 때의 기념비적 효과를 노린다. |
이선영・미술비평 |
권기범 <JUMBLE PAINTING 09_GRAVITY TS (Tube)> 혼합재료 380×3100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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