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정비파
판화를 일러 ‘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판면(版面)에 밑그림을 그리고, 깎고, 찍어내는 고단한 수고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정비파는 이러한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우리 국토의 광경을 대형 판화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개인전 <국토>(7.15~8.20)를 통해 우리 땅의 장대한 면모를 확인하기 바란다.
국토미학-정비파 판화의 모국어
김종길 미술비평
시인 조태일은 《국토 서시》에서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는 것이 국토라고 노래했다. 시인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우리 예술가들은 국토에서 미학적 모국어의 뿌리를 열망했다. 그것은 그들이 궁구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어였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우리 근대미학의 체계와 정립을 위한 근대성의 탐색에서 혼란을 초래하는 이중구조는 일본을 통한 서구화와 식민지 강제체험일 것이다. 18세기 바움가르텐의 ‘미학’을 동아시아의 문자언어로 번역해 유포시킨 일본이라는 통로는 대동아공영권의 식민정책과 세계전쟁, 그리고 잔혹한 학살의 주범이라는 구조 속에서 동시에 살펴야만 제대로 보인다.
근대국가 형성기에 우리는 국가를 상실했고 해방된 뒤에는 미군정(남한)과 소군정(북한)으로 분할되더니 결국 두 개의 정부를 수립하고 이데올로기 전쟁을 벌여야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분단은 고착되었고, 한반도 내에서 완전한 독립국으로서의 통일 대한민국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다. 이러한 역사의 비정상적인 분절과 분단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근대성의 인식을 완전히 다른 구조 속에 놓이게 했다.
유럽의 우파 정책과 정신이 보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민족’의 개념이 우리에게는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중앙아시아, 하와이, 쿠바 등 제3세계로 이어진 디아스포라의 상처로 인해 진보적 정신과 미의식으로 계승되었고,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이념의 잣대를 극복하는 ‘저항의 신념’이자 심연의 깊은 뿌리로서 근대미학의 실체를 추궁하는 슬픈 단서이기도 했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우리 민족의 근대미학과 근대성을 찾아 접근할 때 자주 민족미학의 본질과 마주하는 것은 이산과 이주와 분단이 그 내부에서 뜨겁게 부글거리면서 그려낸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한국작가회의로 개명하면서 ‘민족주의 담론을 넘어서자’고 했으나 그것은 한민족의 탈영토적 개념으로서의 ‘민족담론’을 남한에 고립시키는 영토적 개념으로 협소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민족주의 담론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치열한 현실의제이면서 전 세계에 걸쳐서 흩어져 있는 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심지어는 해외 입양, 파견 노동을 포괄하는 문제이다.
광복 70주년(그것은 동시에 분단 70주년이기도 하다)을 맞아 기획된 정비파의 <국토>는 그런 상실의 카오스가 여전히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는 역사적 근대와, 꿋꿋하게 살아서 민족의 현재를 성취해낸 국토의 옹골찬 풍경을 형상화한 전시다. 그는 1994년 이십일세기 화랑에서 연 첫 <국토기행>을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오롯이 ‘국토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목판화를 새겨왔다.
참된 실재로서 국토의 의미
2004년 <우리 꽃 우리 그림 판화초대전> 이후 11년 만에 개최하는 이번 개인전은 그가 작품을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의 문제의식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미의식의 강밀도를 보여준다. 그는 1983년 ‘인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의 ‘인간’은 1985년의 ‘지금 우리는’(<지금 우리는전>)과 1986년의 ‘여기는 한국’(<여기는 한국전>)이 지시하듯 당대 한국의 현실을 사는 민중의 모습이었다. <한국미술 85년전>(1985)과 <젊은 세대 신선한 발언전>(1986), <미술대동잔치>(1987), <민족미술 큰잔치>(1992)를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궁구해야 할 민족미학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그는 계명대에서 양화를 전공했으나 목판을 만난 뒤로 양화를 버리고 줄곧 목판에 매진했다. 목판에 대한 천착은 오래된 우리 미의식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은 그에게 ‘몸이 받는’ 미적 형식이기도 했던 것 같다. 10년 전 경주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양화를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판각(板刻)’에 주목하게 되었고 “칼 맛, 칼의 선이 나와 맞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덧붙여서 양화로는 겸재 정선의 회화적 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붓을 놓고 칼을 들었다고도 했다.
전통적인 판각을 변용하되 그것을 현대적인 미감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판각이라는 형식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을 터. 그가 현대인의 자기정체성 상실을 다룬 인간 군상과 역사적 변동의 주체로서의 민중, 노동자, 농민의 삶터인 마을 부락을 주제 삼거나 석굴암의 뛰어난 부조 작품들-팔부신중(八部神衆), 인왕(仁王), 사천왕, 천부(天部), 보살, 나한(羅漢), 감불(龕佛)-을 목판화로 재해석하기, 전통화의 기법을 차용해서 지금 여기의 풍경을 새기기, 옛 지도의 산수지리 기호를 차용해 화면구도를 혁신하기 등은 미적 주제로 미적 형식을 실험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새로운 주제에 부합하는 판각의 기법과 구도, 양식, 색을 창조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정비파의 작품세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언급했듯이 국토기행을 통한 ‘국토의 미학’이 그 하나다. 199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작업은 국토를 이루는 산하의 응축된 산세와 지세를 바탕으로 우리 국토의 빼어난 실경을 ‘덜어내기’의 판각미학으로 완성하고 있다. 시인 조태일이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했듯이 그는 발로 누빈 산하의 풍경을 판각으로 옮겨 ‘사(事)’의 현상에서 ‘이(理)’의 참된 실재를 찾는 목판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사형취상화(捨形取象化)’다.
산수에 있어 상과 형을 두고 중국의 옛 화가와 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남겼다. 형호는 “산수의 상은 기세가 상생하는 것”이라 했고, 왕원기는 “기세를 좇아 위치를 정하는 것”이 좋은 그림이며, 종병은 “질박함이 있으면서 취령함”, 왕유는 “산수에서 먼저 기상을 살펴보고 나중에 청탁을 가리고 위치를 정한다”고 했다. 왕리는 그림이 비록 형상(形狀)으로 나타나지만 의가 중요하며, 의가 부족하면 이를 비형(非形)이라 함은 옳다고 했다. 의가 충일한 산수! 정비파의 국토는 그런 동아시아의 미학적 핵심에 민족미학 의제로서의 국토를 동시에 사유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가로 6m의 장대한 국토 <백두대간>을 보면 남한만이 아니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아니 그 너머의 바이칼 시원까지 가 닿는 굽이치듯 흐르는 산하의 힘찬 맥을 펼쳐내고 있다. 정비파가 사유한 참된 실재로서 국토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산하에 새겨진 ‘역사의 궤적’이라고 생각한다. 민족미학의 관점에서 국토를 사유하는 것은 상실의 근대성을 회복하고 극복하는 새로운 민족해방의 상징투쟁일 것이다. <국토-한국 근대사>, <국토-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설악산 암봉(巖峰)을 주봉으로 활달하게 산세를 드넓게 펼쳐 놓은 뒤, 거대한 일곱 마리 흰꼬리수리가 하늘에서 다투는 장면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새겨 놓았다. 일곱 마리, 70년, 다툼, 투쟁….
둘째는 그 스스로 불교판화라고 부르는 불교 유적지의 풍경이다. 문경 봉암사 백운대, 운주사 천불 천탑, 경주 남산, 팔공산 선보사 갓바위,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한 여러 곳을 새겼다. 잡다한 풍경의 세목들을 덜어낸 자리에서 칼 맛의 간략한 선으로 남은 이 땅의 불국토는 명징하다. 10년 전 그가 대구에서 경주로 작업실을 옮긴 것은 천년 신라의 불국토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경주 남산 때문이었다. 그는 판각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풍경의 미학을 곧잘 추궁하는데, 불교판화의 미감이 살아있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의 <동해바다>, <서해바다>, <남해바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불상을 새기지 않고 풍경 하나만으로 불국토를 완성했다고 해야 할까? 그 세계는 하나의 풍경으로 이뤄진 세계이지만 현실과 초현실과 비현실이 오버랩된 듯한, 그러니까 정신으로서의 비경을 자아낸다. <태백산맥>(1994)과 <백두대간>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켜켜이 쌓아서 물결처럼 뻗어 올린 풍경이라면, ‘바다’ 연작은 봉우리 하나하나가 정신의 푯대로 선 듯한 풍경인 것이다.
셋째는 삶터의 일상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생태적 영성에 관한 인간과 자연의 이치를 사유한 시적 판화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서 세 번째와 두 번째의 구체적 실경들은 배제했다. 1956년생인 그는, 50대의 10년을 ‘국토미학의 고갱이’를 새기는 데 완전히 바침으로써 목판화가 성취할 수 있는 판각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작품의 크기에서, 그 풍경의 밀도에서, 산세와 지세를 드러내는 기법에서, 새와 나무와 산과 강을 동시에 표현하는 수묵의 미감에서, 그리고 시간 수행의 천착과 판화의 상징성과 근대사 및 현대사에 이르는 역사인식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러한 시도는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모순의 근대성이 여전한 현실에서 모순 극복의 민족미학이라는 새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세기를 횡단하는 디지털 아방가르드의 상대축에서 느린 목판화가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힘은 얼마나 황홀한가! ●
정 비 파 Jung Bipa
1956년 태어났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을 비롯 뉴욕 등지에서 총 1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과 기획전에 출품했다. 현재 경주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