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두렵지만 황홀한
하이트컬렉션 2.27~6.5
중견 화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로 구성된 만큼, 회화의 현재를 확인하는 자리일 듯싶어, 필자가 출강하는 미대 수강생들에게 토론 과제로 내준 전시가 <두렵지만 황홀한>이다. 한 학생이 전시 제목 ‘두렵지만 황홀한’의 뜻이 전시를 통해 파악되지 않으며, 출품작들의 공통점이 뭔지 모르겠다고 지적하길래, 전시 제목은 우연적으로 선택되었을 것이고 기획의 초점은 중견작가들이 추천한 후배 화가들의 면모를 확인시키는 데에 있다고 답해줬다. 또 추천자 6인의 회화관이 상이한 만큼 피추천된 13명 사이에 작품이 균질하지 않고 다변화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추천인 6명과 피추천인 13명의 공통점이 없진 않다. 이들의 대화록을 살피면 회화의 위기라는 해묵은 자문자답이 자주 읽힌다. “저는 가끔씩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하는 작업, 즉 회화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라는 전현선의 고민이나, “이렇게 강하고 자극적인 것만을 원하는 … 시대에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 정물화라는 진부한 제목의 평면 그림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란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자의식이 밴 12년 전 작가노트를 이번 대화록에 재수록한 김지원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창작과는 거리를 둔 평론가로서, 화가만이 공유하는 미적 질감이 있음을 인정한다. 완성작의 우열을 좌우할 때 화가들이 흔히 의존하는 색감의 선택, 안료의 물성, 붓질의 재질감 등이, 평론에선 곧잘 간과되는 사실 역시 잘 안다. 그래선지 회화의 가치를 다룬 대화에서 홍승혜는 “요즘은 회화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추세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회화란 여전히 작가의 몸이나 정신을 드러내는 붓질, 색채의 선택 등이 중요”하다는 경험을 털어놓았고, 이번 전시 제목에 인용된 카툰풍 작업을 하는 유한숙마저 “회화만이 가지는 특유의 촉감, 정서”를 신뢰하다고 밝힌다. 전적으로 회화에 집중한 이 기획을 추동한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화단의 주 무대를 다매체 예술이 장악한 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때때로 미심쩍은 공감마저 일으키지 못하는 다매체 예술의 선전 앞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미술의 원형인 회화의 현재를 검토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럼에도 <두렵지만 황홀한>에 피추천된 주목할 화가 13명 사이에 평면이라는 장르적 공통점 외에 교차점을 찾긴 어렵다. 13명이 지향하는 미감도 다분히 차이가 있다.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의 맥락이나 합의하기 힘든 작품의 우열까지 치면, 다매체 예술에 버금갈 만큼 회화의 현재는 친숙했던 예전의 바로 그 회화가 더는 아니다. 그래선지 우열을 가르는 합의점도 얻기 힘들다. 전시를 본 학생 일부가 정은영의 작업을 저평가했는데 실물 케이크를 닮지도 않았으며 시각적으로 근사하지도 않아서란다. 안료로 케이크와 김밥을 만든 정은영에게서, 회화를 가둔 프레임 밖에서 물감으로 동서양의 음식이라는 뜻밖의 결과물을 낳은 재치를 높게 산 나와는 차이가 컸지만 내 생각을 털어놓진 않았다. 학생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고, 물감을 케이크와 김밥으로 둔갑시킨 정은영의 태도에서 작가적 자의식을 읽은 내 해석이,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편”이어서 안료로 입체 조형을 택했다는 작가의 의중과 달랐던 탓도 있다. “그림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풍겨야” 한다는 왕선정이나, “좋은 그림을 보면 자세한 내용이나 무슨 맥락인지 잘은 몰라도 그냥 좋은 게 느껴지잖아요?”라는 최수연이나, “텍스트가 비주얼의 쾌감을 증폭시킨다(회화가 이제는 많다)”는 홍승혜의 견해는 서로 다른 주장이지만 공존한다. 그것이 다매체 예술의 선전과 다변화된 회화가 뒤엉킨 속에서, 화가가 찾는 어려운 길이다.
반이정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