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리경 역전이(逆轉移)
도쿄 메종 에르메스 2014.10.31~1.7
현대 건축의 거장 렌조 피아노가 디자인한 도쿄 긴자의 메종 에르메스는 건물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이 대기와 빛의 변화에 반응해, 투명한 아이스큐브를 쌓아놓은 듯한 유리 표면은 한낮의 하늘과 구름의 표정을 담아내고 밤에는 실내의 불빛으로 황금색을 머금는다. 자신과 외부를 물리적으로 규정하고 구분짓는 건축물의 외피가 대기의 변화를 컨트롤하기보다 겸허히 받아들이는 까닭에 ‘빛’을 주제와 소재 삼아 작업해온 리경에게는 전시 공간 자체가 영감이자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대기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빛’의 흐름을 담기 위해 작가가 택한 재료는 ‘자개’다. 전시장 바닥을 오색의 영롱한 빛깔로 뒤덮은 자개는 이른 아침 서늘한 연못이 되고, 정오의 햇살 아래 찬란의 빛의 향연을 펼치다가 도시의 현란한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차분히 밤을 맞이한다. 빛을 발산하거나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품는다’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대기와 건축물과 리경의 신작이 함께 만들어낸 경이로운 풍경은 시간에 따라 방향과 톤이 바뀌는 사운드와 어우러져 보이지 않는 태양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전구와 초현실적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레이저 등 인공광을 주로 사용해온 작가가 햇살을 가득 머금은 텅빈 갤러리와 조우하는 순간 빛의 근원인 태양을 강렬히 의식하고 이를 작업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은 빛을 ‘만들기’보다 ‘받아들이기’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태도의 전환은 빛의 시각 효과를 넘어선 총체적인 신체 경험을 통해 절대 가치에 대한 방법적 회의를 거듭해온 그가 바로 인식의 주체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작업의 여정을 다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신작 <뱀의 키스(Serpentine’s Kiss)>와 2003년에 발표한 바 있는 <선악과(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 Evil)>로 구성된 리경의 이번 개인전은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라는 심리학 용어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는 심리 상담에서 환자가 주변 인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치료자에게 옮기는 전이 현상에 대한 영향으로서 치료자가 환자의 무의식에 반응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심리적 과정을 통해 작가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대상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전설 속의 인물 ‘아사녀’이다. 햇빛을 머금고 수면처럼 반짝이는 자개 바닥은 사찰에 격리된 채 불상을 제작 중인 남편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왔다가, ‘불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탑 그림자가 떠오른다’는 스님의 말을 믿고 연못가를 지키던 중 기다림에 지쳐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한 장면이 된다.
리경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야기한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질문한다. 결코 연못에 떠오를 리 없는 불탑의 그림자, 그리고 아사녀의 속절없는 기다림에서 뚜렷한 목표도 그에 따른 보상도 보장받지 못하는 예술이라는 활동을 통해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사회인들이 이미 의식의 뒷구석에 봉인해놓은 인식론적 질문들을 끌질기게 되묻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뱀의 키스>는 <마지막 희생(Last Sacrifice)>, <(하나님이) 아담을 불렀다(He called to Adam)>, <선악과(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 evil)> 등의 제목이 암시하듯, 특정 종교의 언어와 도상을 빌려 지각과 인식의 이율배반이라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어온 그의 작업 맥락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바다에서 태어난 자개가 하늘의 빛을 반사하여 수만 가지 색을 만들어내듯이, 작가는 자신을 성경과 전설의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그들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빛이 자개에 부딪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듯, 그들이 작가를 통해 우리 개개인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 신의 아들 예수, 세속적 순교자 아사달과 아사녀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루어진 리경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수많은 의미는 전시장 입구에 쓰여진 가스통 바슐라르의 글귀로 함축할 수 있겠다. “그 자신을 소멸시키며 순수하게 타오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불순물이며, 이는 순수의 양식과 재료가 된다.”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위 리경 <역전이-Serpent’s Kiss> 자개, 합판, 멀티채널 사운드, PAR 조명, 자연광 가변설치 2014
ⓒ Naca’sa&partners Inc. / Courtesy of Foundation d’enterprise Her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