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미묘한 삼각관계
서울시립미술관 3.10~5.10
역사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은 국가 간의 정신적 차이와 습성을 낳는다. 정신은 한 사회의 제도를 형성하고 그 제도를 통해 세대가 구성되며, 이러한 거시사적 틀 안에 위치한 한 사람은 또한 미시사를 생산한다. 서울 시립미술관의 <미묘한 삼각관계展>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세 작가, 양아치, 쉬전, 고이즈미 메이로의 미시사와 거시사가 교차하는 지점 위에 서 있다. ‘시간’은 이 전시의 매우 중요한 테마로, 같은 세대의 세 작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각기 다른 시기를 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형적 시간을 동시적 관계, 즉 ‘미묘한 삼각관계’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런데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울 한복판에서, 가미카제의 영상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에 대한 거북함이 그것이다. 더욱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에서, 피해자 담론을 옹호하는 일본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언어들이 관객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이 어떤 이유로 거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일은 흔히 있지만, 고이즈미의 작업에 대한 비판은 한국이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의 단면 또한 함축하는 흥미로운 해프닝으로 보인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 이야기>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둘째 며느리로 유명한 배우 하라 세츠코는 쇼와시대, 친절과 미소의 대표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렇게 고착된 이미지는 개인의 영혼이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박제처럼 한 시대와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알터피스 #6, 2014>에서 점점 일그러지는 하라 세츠코의 초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을 통해 각인되고 왜곡되는 역사와 현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는 <어린 사무라이의 초상, 2009>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미카제로 분한 배우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부추김에 도취해 결국 흐느끼고 마는데, 비평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가 추신쿠라(忠臣藏)증후군이라 부른 일본의 이 독특한 정신이 실체도 없는 국체(國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파시즘으로 고조되고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근대적 합리화의 핵심인 탈주술화에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병리적 상태였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유효함을 드러내는 짧은 서사이다.
또한 아버지가 천장에 그리는 검은 비행기(<기억술>(아버지)2011)나 공습의 순간을 증언하는 갖힌 기억(<갇혀진 말> 2014)은 실체없는 우상에 눈멀었던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광기의 결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오랄 히스토리 – 1900년부터 1945년 사이 일본과 그 주변에서 일어난 일>(2015)에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의 현재를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 <시각적 결함>처럼 일본의 새로운 세대 역시 여전히 먼 눈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음을 직시하도록 한다.
직접적이며 강렬한 방식으로 자국의 근현대사에 접근하는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들은 동시대 일본 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메타적 역사인식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는다. 따라서 일본의 기형적 근대화 과정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관객은 강력한 피해자의 기억을 호출하며 어린 사무라이나 오랄 히스토리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들이 제시하는 직접성을 무조건 역사에 대한 불경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미술작품이 제시하는 진지한 역사적 성찰에 대한 외면이며, 과거를 냉정히 직시하는 태도와도 어긋난다. 요컨대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은 서울뿐 아니라 도쿄, 베이징에 전시하더라도 불편할 것이며, 이 불편함의 이유는 세 도시 각기 다르다. 동일한 불편함과 서로 다른 이유, 이것이 한중일 세 나라의 미묘하다면 미묘한 삼각관계의 현재이다.
구나연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