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서용선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
금호미술관, 학고재갤러리 4.17~5.17
윤진섭 미술비평
얼마 전 한국의 민화를 집대성한 《한국의 채색화-궁중회화와 민화의 세계》가 10여 년간의 기획 끝에 출판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30여 명에 달하는 민화전문가가 이 책의 출판에 관계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책 제목을 ‘민화’ 대신 ‘채색화’라고 붙인 것은 민화를 전통채색화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 텔레비전 방송은 전하고 있다.
지금 나의 관심은 민화를 채색화로 불러야 하는 당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화가 집대성된 결과에 있다. 아마도 명칭에 관한 논의는 다양한 학술행사를 통해 지속될 성질의 것이리라. 그보다는 오히려 민화가 이번 출판을 계기로 미술계의 전면에 부상된 사실 그 자체에 있으며, 이를 계기로 민화, 그 중에서도 특히 핵심인 ‘오방색(五方色)’에 대한 논의가 차제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왜냐하면 한국 전통미술의 정수 가운데 하나인 민화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엄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 이에 대한 조명은 상당히 미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출판을 계기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전시기획과 출판을 통해 지속되길 기대한다.
최근 금호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 두 곳에서 열린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전>은 비상하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전시가 나의 관심을 끈 가장 큰 이유는 서용선이야말로 티 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민화의 핵심인 오방색을 주조로 작업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서용선 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올해의 작가전>(2009)과 <이중섭미술상 수상작가전>(2014)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형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는 40여 년에 걸친 그의 작가적 이력이 ‘역사화’라고 하는, 단종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에 초점을 맞춘 특유의 그림들로 점철돼 왔으며, 그러한 그의 작품세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여러 도시로 확대되어 ‘인간’을 통한 인류애의 보편적 지평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나의 관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금호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 두 곳에서 열린 이번 기획전은 서용선의 작가적 역량이 회화와 조각을 통해 총 결집된 근래에 보기 드문 전시였다.
서용선이 그림과 조각을 통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인간’이 그의 그림과 조각을 통해 역사와 도시를 후경으로 삼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방색’이 주조음으로 깔려있다. 그에게 오방색은 마치 조선시대 민화의 주조색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선의 역사를 수놓은 단종을 비롯한 왕족이라든지 사대부층, 기타 이 땅에서 살다 스러져간 숱한 민초들의 삶과 애환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기울여온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이제 보다 확대되어 인간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세계의 여러 도시로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중간 결산 성격의 것으로 서용선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용선은 서울을 비롯하여 베이징, 뉴욕, 베를린, 멜버른 등 세계의 거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외국의 도시들은 그가 장기 체류한 곳들이다. 그 그림들은 그가 단순히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시민들의 삶의 단면을 관찰한 후 이를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내면화한 것이다. 서용선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의 표정에서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인간에게 기울이는 도저한 관심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숱하게 제작한 기존의 역사화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거니와, 그가 한 사람의 작가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인간의 유형 중에서도 유독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기득권층이 아니라 소외된 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오방색을 주조로 표출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번 전시에도 가령 <미테 다리 연주자들>(2012~2015)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시에서 살아가는 무명의 민초들을 소재로 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광장, 술집, 그리고 뉴스에 등장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서용선은 인물화 못지않게 많은 양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것들은 주로 도시 풍경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도시란 그에게 있어서 다양한 인간들에 의해서 다채로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셈이고 그것은 그런 이유에서 인간과 불가분의 소재를 이룬다. 서용선은 그러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특유의 시선과 관점에서 예리한 메스를 들이댄다. 그는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그것들의 후경 층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정치적 내지는 제도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를 다소 음울한 어조로 화면에 풀어낸다. 그는 강렬하고 때로는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의 강한 빨간색과 청색을 비롯한 오방색을 써서 기층민의 정서를 광포(狂暴)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지닌 야생성은 주로 정치적 내지는 제도적 억압에 대한 기층민의 분노와 무기력(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양팔을 늘어뜨리고 있다)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등가물이다. 서용선은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기층민의 야생성이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정서임을 특유의 강렬한 오방색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2014 뉴스와 사건> 나무 보드에 아크릴(14조각) 2015 위 <NY지하철>(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