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유비호 해 질 녘 나의 하늘에는
성곡미술관 2015.11.13~2015.12.31
양효실 미학
어떤 예술가는 생산적 실체를 허구적 이미지로 대체한다. 예술가는 의미를 비우기 위해, 의미의 결핍을 가리키기 위해, 무의미의 힘을 증언하기 위해, 텅 빈 이미지를 획책한다. 절룩거리는 사내는 소복 입은 노파를 업고 골목을, 아파트 근처의 천변을, 흙더미 근처를 배회하거나 육교에서 오래도록 내려온다. 그것은 맥락 없이 불현듯 나타나서 도처를 횡행한다. 맹인에게 업힌 다리 ‘병신’은 완전성을 보충·반복한다. 유비호가 찾아낸 이미지인바 노파를 업은 사내는 더 절룩거릴 뿐이고 더 고통받을 뿐이다. 사내에게는 배가된 불행, 넘쳐나는 불행이 입혀져 있다. 그러나 핍진성이 아니라 서정성이어야 했기에 사내는 노동자도 장애인도 아닌 절룩거림을 ‘연기’하는 젊은 남자이다. 사내는 견딜 수 없는 불행을 철거 예정인 폐가 ‘안’에 버린다. 폐기의 장소는 불가능한 유기의 이미지 덕분에 ‘완성’된다. 기다리다가 죽어갈 늙은이를 등 뒤로 남기고 남자는 화면 밖으로 나갔다.
근대적 재난은 무차별적이고 무한히 반복된다. 근대적 재난은 신적 의미를 탈각한 채 계속 일어날 뿐이다. 사후적으로 선정된 원인은 제거 불가능한 것으로서만 기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대적으로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근대적 삶이 잔인하리만큼 무의미하듯이 근대적 죽음은 우스우리만큼 잔인하다. 그리고/그런데 우리는 슬프다. 우리는 근대적 죽음 앞에서 논리적으로는 웃어야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울고 있다. 너의 죽음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고 그렇기에 ‘나’의 죽음이다. 단원고 여학생의 엄마 박혜영은 세월호 합동분향소에서 39분38초 동안 카메라 앞에서 윤민이에 대해, 고통에 대해, 슬픔과 분노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이 긴 여자인 박혜영이 결국 눈물을 보일 때, 카메라를 향해 “윤민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엄마가 금방 갈게”라고 말할 때, 1999년 LG에서 출시한 낡은 TV 수상기 앞에서 ‘나’는 운다. ‘나’가 앉은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을 작가의 작고 가냘픈 신음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들린다. 묻고 기다리고 들었을 그의 몸-소리가 우연처럼 흔적처럼 실수처럼 화면에 묻어 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는 카메라처럼 고통을 보는 자이다. 상실의 슬픔은 우리를 늙고 낡은 노파나 절룩거리는 사내로 만든다. 작가는 슬픔의 서정성을 재난의 핍진성에 단단히 묶는다. 슬픔은 장소, 사람, 기억을 갖는다.
전시장 1층에서 노파를 업고 걷다가 유기했던 사내는 2층의 한 전시실에서는 노파를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른다. 부조리의 화신인 뫼르소를 연기하는 등장인물은 기왓장이나 물건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노동자처럼 올라가지만 버릴 노파를 짊어짐으로써 고려장을 환기시킨다. 버리기 위해 오르는 사내의 노동은 5개의 채널에서 반복된다.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 헐거운 이미지는 무겁다, 올라간다, 버린다처럼 실존적 무게를 담지함으로써 알레고리 기능을 한다. 그리고 유비호의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은 모두 기다린다로 수렴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뒷모습이고 미동(微動)의 호흡이고 전시장에 깔리는 안개이고 망향탑이고 밀물이고 풍경이다. 유비호의 인물들은 일부러 올라가고 일부러 절룩거리고 일부러 멈춰서고 일부러 기다린다. 근대적 재난을 언급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사라짐과 기다림의 시적 이미지로만 채워진 무대를 연출하는 작가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상처를 떠안는 미적 형식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상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이지만 노래는 보편적이고 서정적이기에 누구나 위로받는다는, 근대적 예술의 문제 혹은 이념 말이다.
위 유비호 <안개바다 N35.625979 E126.466054>(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디지털 프린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