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윤정원 최고의 사치
갤러리 스케이프 4.24~6.14
김노암 세종문화회관 시각예술전문위원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낮게 매달려 있다. 굉장히 많은 물건, 인형, 이미지가 마구 엉켜있다. 복잡하게 집적돼 있는 사물, 이미지가 전시장을 채운다. 오브제는 곧 폭발할 것처럼 사물로 뭉쳐있다. 화려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제품과 온갖 컬러가 가득하다. 물건으로 가득 채운 집처럼 갤러리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다.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모이면 그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된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없게 된다. 그냥 시각적 유사성에 의해 ‘이것은 키치다’라고 상투적인 해석과 범주로 가두는 것은 생산적인 담론이 아니다. 관객은 최정화의 작업과 비교해서 보면 사전적 의미의 ‘키치’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을 수도 있다.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는 회화와 오브제들로 연출되는 시각이미지들은 마치 두 작가가 함께 전시하는 듯하다. 다중인격과 다원성의 세계에서 두 인격이 결합하고 융합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인격이 두 개로 갈라지고 또 하나의 취향이 두 개의 취향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회화와 오브제의 두 개별적인 운동과 흐름이 갤러리 1층과 2층을 나란히 달리고 있다.
제목 ‘라 스트라바간자(La Stravaganza)’는 사치스러운, 호화스러운, 화려한의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 어로 바로크나 로코코의 화려한 궁정과 귀족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한글 제목 ‘최고의 사치’는 마치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같은 윤리적인 인상을 준다. 욕망 충족에 몰입하는 지독한 자본주의와 시장가치의 사회에서 그래도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휴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따듯한 세계가 있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세계와 사물과 관계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떤 형태로든, 또 어떤 방향으로든 충분히 성취되었을 때 인간은 행복감을 느낀다. 전시는 작가가 오랫동안 매우 깊이 몰입해왔으며 그것이 매우 특별한 행복감을 주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작가와 관객의 의식상에는 시각적 감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마음의 운동이 호사를 누린다는 듯 보인다. 언제든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상황과 욕구가 충족될 수도 있다는 관념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담론이다.
‘최고의 사치(La Stravaganza)’는 생각의 운동을 부자로 향하게 한다. 사치는 부자의 특권이니까. 물론 평범한 중산층도 차상위계층도 빈곤층도 모두 사치할 수 있다. 제품과 사건과 감정이 과잉인 사회에서는 누구나 결심만 하면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사치’는 대부분은 나쁜 것으로 학습되었다. 인류의 생산력이 미천할 때는 당연했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로 들어서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산물을 이미 까마득히 돌파한 경이적인 생산력 사회에서 ‘사치’는 미덕으로 둔갑한다. 그런데 사치가 정치경제의 세계에서 심미적 세계로 넘어오면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버린다. 상대적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심미적 세계에서 억만장자가 벌이는 사치스러운 소비와 길거리 노숙자나 거지가 제대로 된 한 끼의 식사를 즐기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치가 가능하다는 것과 실제 사치를 부리는 것은 다르다. 부자는 언제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으나 노숙자와 거지는 항상 그럴 수 없다. 운이 좋아야 한다.
위 윤정원 <최고의 사치>(가운데 설치작) 혼합재료 2014~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