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응답하라 작가들
오뉴월 2014.11.28~2014.12.21
2층 전시장을 잇는 계단에서 ‘작가피…’ 라는 문구를 발견한 순간 필자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잠깐만. 이 문구가 웃으라는 말장난이었을까? 어쩌면 작가피(fee)는 진정 작가의 피(血)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전시는 오뉴월에서 열린 고동연 기획의 <응답하라, 작가들>이다.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미술계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고민하는 이 전시는 우리 시대 순수 시각예술인이 겪는 고군분투기가 그려진 작업과 이들의 생존을 위한 자료들로 채워진 예술계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제공했다. 그리고 기획자가 인터뷰로 얻어낸 비하인드스토리는 곧 출판될 예정이다. 꼭 필요한 전시였고 방대한 양의 자료가 제공되었지만 작가의 주제 범위가 방대해서 제도 비평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 전시 자체의 통일성을 꿰뚫어보기 힘들었으리라는 판단이다.
덕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필자가 ‘작가피’라는 문구를 보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피가 작가의 연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에서 비롯한 듯하다. 작품 가격이란 으레 백만, 천만 원대에 이르는데 10만 원대의 작가피가 뭔가 대수라고 ‘피’ 운운한단 말인가? 작가피를 이렇게까지 굳이 받아내려는 의지가 작가에게는, 특히나 팔리지 않고 전시에 초대만 될 법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에게 작가피란 생계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인 듯하다. 더구나 공공미술, 프로젝트성 작품과 같이 과정만이 강조되는 예술 실천이 비대해진 오늘날의 예술 현장을 고려해보면 연간 기관이 지출하는 작가피 또한 상당하겠지 싶다. 단, 그들이 작가피를 지급한다면 말이다.
예술계가 작동하는 방식
기획의 주체가 자신이 초대한 이가 할애하게 될 시간에 대해 보상하는 것은 당연할진대 ‘선한, 공공’ 기관이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걸까? 왜? 이는 기존 예술계의 관습에서 야기된 문제라고 본다. 작가는 언젠가는 정통에서 인정받는 거장이 되어 미술관과 화랑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모셔가게 될 날을 고대하며 장인적 기술과 숭고한 정신을 연마한다. 따라서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할 공식기관인 미술관과 화랑의 권세를 감내하는 것이 기존의 미술계 풍조였기 때문에 작가와 인증기관의 관계는 동종 업계의 동료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화랑과 미술관 또한 작가가 거장이 된 후에는 작품 가격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에 동료인 작가가 굳이 작가피를 받겠다고 고집한다면 찌질하게 볼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김아영 또한 예술계 안의 사회적 관계를 주목했고 이를 댄스 스텝으로 도식화한 <바빌론 댄스>를 선보였다. 바빌론 댄스에서는 공모, 대안공간, 화랑을 선택하거나 미술을 포기하는 4개의 장단 중 하나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료 관계가 항상 평등하지는 않다. 박준범의 <비디오 아트의 유통기한>은 예술계에서 벌어지는 기관의 횡포를 고발한다. 작가는 어느 날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팅겔리 미술관(The Tinguely Museum)이 자신의 비디오를 파스칼 반회케 화랑(Galerie Pascal Vanhoecke)으로부터 받아 무단으로 전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는 해당기관들과 서신을 교환했고 그 내용을 우스꽝스럽게 번역, 전시했는데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을 짜깁기해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작가님아
미술관이 너네 화랑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우기잖아. 그래서 우리가 네 데모 DVD를 미술관에게 줬다? 네가 화난 건 알겠는데 미술관 전시도 하고 좋잖아, 화 풀어. 빠리의 비디오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파워 있고 빠삭한 화랑인지 모르냐? 미술계 바닥에서 나쁜 소문 돌아봤자 둘 다 뭐 좋겠어? 네가 CUBE에서 전시한 것도 다 내 덕인 줄도 다 까먹고 배은망덕하게…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데 대해 참을 만한 병폐로 여기던 기존 미술계의 관습은 지금도 유지되는 반면 미술계의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개념미술, 포스트-스튜디오라는 용어와 함께 발전한, 작품 판매와는 무관한 활동으로 구성된 예술영역은 상대적으로 커졌으며 이제 예술계는 더 이상 작품 가격으로는 보상을 약속할 수 없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런 구조는 작가피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노동의 소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예를 들면, 작가들은 작품 생산 외에 토론회, 레지던시 등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교육 등의 활동, 이를 위한 사이트의 리서치 및 글쓰기, 스폰서 확보, 설치 용역 및 장비 제공, 디자인, 운송 및 교통비 확보와 같은 활동을 추가적으로 (그리고 현재는 대부분을 무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할애되는 시간만 고려해도 그 비용이 작가에겐 크나큰 타격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에 초대된 작가들은 신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팔리는 블루칩 작가도 아닌, 어디서 이름은 자주 들어본 비교적 안정된 작가들인데 그럼에도 예술과 자본이 만나는 접점에서 약자로 살면서 예술계의 병폐를 메우느라 세컨드 잡으로 고생한다. 예를 들어 김재범의 <출근 기록 드로잉 하기>는 작가로 행세하기 위한 비용을 벌려고 택한 세컨드 잡의 출근부 도장으로 로고를 만들었다. 오늘날 예술의 생산-소비구조에서 작가피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궁핍하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제시하는 ‘피’의 문제는 미술계가 해결해야 하는 업계 윤리 혹은 작가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존엄성 침해의 문제이다.
예술 실천은 노동인가
지난해 11월 말, 서울 시청에서는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 환경의 조건’이라는 제목 아래 심포지엄이 열렸고 12월에는 <응답하라, 작가들전>의 연계 행사로 토론회도 열렸다. 필자는 이 두 행사가 예술가와 노동의 문제를 다룬다면 ‘예술가를 과연 노동자로 불러야 할 것인가’와 같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리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적어도 두 행사에 참여한 관객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불리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예술이 소명이라는 개념이 팽배한 만큼 아직까지 ‘예술가’와 ‘노동’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뜨거운 감자이다. 예술이 소명이라는 감성은 <응답하라, 작가들전>에서도 소개됐다. 함혜경은 <거짓말하는 애인>이라는 스니커즈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려가려다 예술을 해버리고 만, 그래서 마진이 남지 않게 된 어느 작가의 업무일지를 비디오로 만든다. 예술이 아니라 직업을 갖겠다는 것이 애인이 말하는 거짓말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전통적인 미학에서는 자본으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두기 위해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규정하면 예술이 자본이나 정치, 사회로부터 비평적 거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서 생산은 자율적인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입장과는 달리 예술가를 노동자로 구분하는 논리는 유물론에서 나온다. 마르크스가 “저자는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한 생산적인 노동자이나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배를 부르게 하는 한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이다”1라고 했다던데 필자는 그의 언급이 마치 ‘예술로 돈을 벌면 순수하지 않다’로 들린다. 오히려 모든 정신활동을 경제적 토대에 묶느라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게 돼버린 관념론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예술가가 자본과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있기나 할까? 미켈란젤로도 보상을 받았을 텐데 그렇다고 그의 예술성이 교황의 것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전통적 예술계는 상거래를 하면서 자율성을 위반하고 유물론은 정신을 강조하면서 자율성을 옹호한다. 이렇게 고전의 논리에서부터 이미 이율배반을 포함하는 개념이 자율성인데다가 학자들은 예술계가 사회적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자율성은 이미 없다고 하는데 작가들은 아직도 자발적으로 궁핍을 받아들인다. 지금의 미술계 구조가 소외하는 노동의 양이 엄청난데도 눈감아주고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노동이 아니라 기획 주체가 감당해야 하는 노동까지 감수한다면, 그 결과는 기존 예술계 구조의 유지이다.
두 행사 모두에서 작가피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례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참가비’나 ‘작품 대여료’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례비는 자선을 베푸는 것 같아 싫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는데 이는 ‘나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으면 배고파요’로 들렸다. 지금까지 국공립 기관의 예산에서 작가피는 아예 제외되어 왔다.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행사의 경우 지원금에서의 작가피 지출이 금지되어 있어 기획자가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려면 스스로의 재원에서 지출해야 한다. 즉, 작가피는 기획 주체의 정의로운 마음이나 자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여건이다. 정부는 고용되지 않은 기간 동안 겪는 전업 작가의 어려운 사정에 공감한다는 차원에서 복지 재단을 만들 당시 작가들에게 자신을 자영업 노동자로 생각하라는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원칙적으로 미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선도적인 것이었으며 감사하다.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작가에게는 경제논리를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반면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도록 하는 시스템 형성은 규제하는 셈이므로 정부 정책은 모순된다. 때문에 재단의 이름에 달린 ‘복지’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예술가들에게는 자선만이 허락되는 셈이다. 여기서 승자는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해 온 ‘기존’ 예술계의 보상구조이다. 그러나 희망의 메시지도 들린다. 지난 1월 22일 정부는 미술작가의 창작활동에 대해 정당한 비용을 지급하는 ‘작가보수제’를 올해 하반기부터 적용하기로 발표했다. 이제 지원금 지출 정책이 바뀌고 사립 및 상업기관만 작가피를 지급하도록 하면 된다.
예술가가 노동자라 불려도 괜찮다면
‘사례비’와 ‘작가피’ 중 어느 단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차이는 기존 미술계의 보상 및 독점구조에 순응할 것인가 아닌가의 입장 차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줄이면서 예술을 보전하려는 입장에 서는 동시에 업계 윤리의 개선을 요구하는 자세다.
예술가를 노동자로 불러도 괜찮다는 이들 중 아트리크, 웨이지라는 단체는 기존의 예술계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들이다. 아트리크(artleak.org)는 작가피를 지급하지 않는 예술기관을 고발하는 게시판 역할을 자처하고 미국의 WAGE라는 그룹(wageforwork.com)과 캐나다의 CARFAC(Canadian Artists’Representation)는 예술가가 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사례비 기준자를 만들어 소개했다. 한스 애빙 또한 기존 예술계가 보장했던 보상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경제논리를 한껏 활용하자는 의지를 보여주는 경제학자이자 작가이다. 애빙은 미술작품의 원본이 가진 허세의 혹은 상징적인 가치와 별도로 저렴한 가격으로 예술을 보급하거나 혹은 포스터와 같은 복제품의 판로를 활성화하여 기존 예술작품의 원본이 가졌던 아우라를 제거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산업화된 대중음악계와 유사한 대중미술계를 상상해보자는 그의 요지 중 하나였는데 이번 전시에 포함된 박재영의 작업은 마치 이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그는 Butter Cutter라는, 디자이너였다가 순수예술로 전향하거나 순수예술을 하다가 세컨드 잡이었던 디자인의 길로 들어선 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전시에는 이전에 수행했던 상대적으로 저렴한 예술상품을 만든 셈인 간이매점용 음식, 디자이너 상품처럼 보이는 순수예술 조형물의 기록과 함께 도록디자인 샘플을 보여주는 ‘자영업자’의 홍보부스가 선보여졌다.
현시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작가들을 생각하면 예술계의 구조조정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술가를 노동자라 부르는 방향으로의 구조조정은 경제논리를 패러다임으로 적용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현진 미술비평
1 Bryan-Wilson, Julia, Art Workers: Radical Practice in the Vietnam War Era, (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 27에서 재인용. 원문은 “A writer is a productive laborer in so far as he produces ideas, but in so far as he enriches the publisher who publishes his works, he is a wage laborer for the capitalist.”
크리스 맨슈어. <예술의 노동점유: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과의 인터뷰>, 《00도큐멘트3 : 다들 만들고 계십니까》, 미디어버스, 2014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