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Afterpiece 막후극
인사미술공간 3.27~5.1
예희정 독립 큐레이터
우리(남선우, 예희정, 최유은)는 2014년 인사미술공간(이하 인미공) 큐레이터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각자의 질문을 모아보다가 비슷한 정서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한 과거의 전시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더듬더듬 알아갈 수 밖에 없음에 대해 얘기하던 날이었다. 선택적으로 기록·수집된 아카이브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과 달라지는 기억을 참조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원전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우리는 미술 실천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의 현재 위치와 연결되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있었던 어떤 ‘계기’와 단절돼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해소하고자 흘러간 시간을 되짚고 의미를 복원하는 차원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의 일회성 때문에 기록과 기억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기록과 기억을 임의적으로 선택, 재구성함으로써 미래인-상대적인 차원에서-이 과거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태도를 펼치고자 했다. 앞선 궤적을 이탈할 수 있는 일종의 ‘이어달리기’인 셈이다.
1층에 들어서면 이정자가 발굴한 <None-passbox>와 <Sextans>를 볼 수 있다. 창고와 에어컨을 가리던 미닫이 벽을 떼어 전시장 입구에 세웠고 정면의 가벽은 예각으로 절단해 열었다. 개관 이래 켜켜이 쌓였을 페인트와 못 자국도 벗기고 긁어냈다. 이 공간을 거쳐간 무수한 전시에 대한 어떠한 정보 없이 오직 개인의 신체적 활동에 의지해 과거를 추적한 것이다. 이 작업은 전시 중간에 복원되고 기록물의 형태로 변모해 마치 아카이브 전시처럼 재배치될 예정이다. 파트타임스위트는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신작 <한 개 열린 구멍>을 제작했다. 인미공의 아카이브를 선택적으로 수집, 촬영한 것을 새로 기록한 영상과 함께 편집한 비디오작업이다. 가까운 과거에 제도에 맞춰 행했던 실용적 행위를 되짚으며 이를 유산으로 삼은 동시대미술 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문한다.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은유하는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유리테이블은 전시를 철수하면서 나온 못 박힌 각목을 쌓아 만들어서 어설프고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들이부어져서 얽히고설키는 페인트는 뜻밖의 효과를 자아내며 이들이 짜는 ‘새로운 판’을 기대하게 만든다.
김민애와 이수성은 조각가가 겪는 현실적 상황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시가 끝난 후에는 물리적으로 반드시 이동할 수밖에 없는, 본래의 존재 맥락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덩어리들이 그것이다. 김민애에게는 이전 전시 혹은 작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글을 써달라고 제안했다. 오직 작가의 기억에만 의존해 예전 작업에 대한 상황적 문맥을 되짚고 싶었다. 작가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커튼에 자신의 첫 개인전 <익명풍경>(2008)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을 인쇄한 <너머, 장면>으로 답했다. 쉽게 읽을 수 없는 이 기억의 레이어들은 2층 공간을 가로지르며 이수성의 작업과 대면한다. 이수성은 일전에 다른 전시에서 ‘테크니션’으로서 만든 검정색 오벨리스크를 2014년 시청각 개인전의 입구에 세웠다. 과거의 작업을 다른 의미로 현재에 다시 안착시키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전시가 끝나고 나면 볼륨이 상당한 작업들은 대부분 해체하는데 가끔 일부분만 떼내서 보관한다고 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실제로 보관하고 있었거나 혹은 제작 노트와 기억에 남아있던 이 기념물들을 조건 삼아 신작을 제작했다. 모든 작업의 제목에 ‘Mark II’가 붙은 이유다.
김진주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인미공에서 인턴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기록과 본인의 기억을 돌이켜서 이 기관의 과거 현장을 다시 펼쳐달라고 부탁했다. 문자화/이미지화되는 과정에서 탈락한 전시의 요소들을 리메이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이 재현, 계승되는 차원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았고, 기록과 기억의 유산을 곱씹으며 획득한 영감을 다른 이와 주고받을 수 있는 창작의 교환 가능성을 작업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관람객은 <기억하기의 권리를 위한 계약서>를 통해 작가의 중개로 기획자와 실제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옥상에 설치된 조각에는 화구와 술잔, 약숟가락이 붙어 있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낸다. 그것은 주변의 다른 소리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는다. 마치 이곳에서 벌어지는 미술활동의 미미한 파동처럼. 이 작품의 제목은 <바람은 기억하고 잊는다> 이다.
위 이정자 <None-passbox> 벽면 자르기(각도 60도 범위), 혼합재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