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정연두 전
정연두의 작품세계-‘가볍거나 무거운’일상의 리얼리즘
입체와 평면,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다루는 작가 정연두의 개인전이 3월 13일부터 6월 8일까지 플라토에서 열린다.
지난10여 년간 선보였던 작가의 대표작 일부와 신작 〈크레용팝 스페셜〉을 선보인다. 작가중심에서 벗어나 대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그의 시선은 주체와 대상을 전복시킨다. 작가와 피사체 그리고 관객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전영백 홍익대 교수
플라토에 열리는 정연두의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전은 도심 한 가운데에 청량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밝고, 즐겁고, 따듯하다. 그리고 가벼운 느낌도 든다. 전시된 작업이 대중 유행가를 다룬 동영상이거나, 일상생활의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어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인터랙티브 매체안경을 활용해 이 미술관의 상징인 로댕의 무거운 <지옥의 문>을 가볍게 눈앞으로 당겨오기 때문일 수도. 죽음처럼 검은 지옥의 나락에서 뒤엉킨 신체들은 순식간에 생생하고 육감적인 누드의 군상이 되어 시각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작가 스스로 ‘사진 조각’이라 부른 신작 <베르길리우스의 통로> (2014)는 정연두의 사진미학이 가진 핵심을 함축한다. 조각을 전공한 사진작가라서일까. 입체와 평면을 넘나드는 시각이다.
결과적인 이미지는 하나의 사진작품이나, 그 배후에 피사체(인물)와의 소통을 위한 수많은 시간과 엄청난 수공(手功)의 노력이 있다. 로댕이 표현한 단테의 지옥은 정연두의 <베르길리우스의 통로>에서 연옥으로 끌어올려진 것인가. 관람자 개인별로 보는 가상공간에서 청동의 지옥에 갇혔던 인간들이 표면으로 부상하며 소생하는 듯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수개월 동안의 <지옥의 문>에 관한 연구에 기반을 둔 모델들의 포즈를 수백 번 촬영, 이를 합성하는 복잡한 작업 과정을 거쳤다. 다수의 드로잉이 그 포즈의 형태적 탐구를 보여준다. 사진이 가진 순간의 포착과 가시적 표면이라는 특징과 대비되는 오랜 시간의 발품과 집요한 관찰, 그리고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꿈을 이뤄주는 비현실적 사진으로 그 이름을 알려왔다. 2000년대 초의 <내 사랑 지니>(2001~), <원더랜드>(2003) 등이 그의 대표작인데, 인물의 꿈을 사진으로나마 실현시켜주는 이러한 작업의 시초가 된 초기작 <영웅>(1998)이 이번 전시에 걸렸다. 이러한 작업은 그 내러티브를 사진이 찍히는 대상 (인물)의 입장에서 만들고, 그(녀)의 소망을 작업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작가중심에서 벗어나려는 점과 대상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 미학에 이보다 적합한 사진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한마디로, 어깨에 힘을 뺀 작업이다. 정연두의 작업이 관객 다수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하다싶다. 내용과 주제 면에서 누구나 쉽게 동감할 수 있는 건, 작가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인물의 입장, 시각, 그리고 욕망과 동일시하고 눈높이를 맞춰서이다. 맞춤 시각이다. 누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인 거다. 더구나 ‘작가’란 존재는 보통사람보다 그 정도가 심하고, 스토리텔링에 능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정연두의 작업은 ‘들어주는 작가’라는 발상의 전환을 거쳤다. 그의 사진처럼 대상과의 동일시에 충실한 ‘착한’ 작업이 또 있을까 싶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순순히 보여준다. 인물이 원하는 대로 꾸미고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준다. 대상과 주체(작가)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점에서 정연두를 따를 작가는 없을 것이다. 미술의 근본 메커니즘이 이러한 대상과의 동일시에 있다고 볼 때 그는 훌륭한 ‘작업 태도’를 지녔다. 이 태도가 중요한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전시의 화제작인 <크레용팝 스페셜〉도 이러한 태도의 결실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반짝이가 ‘촌티 나게’ 화려한 파란색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마주치는 동영상과 설치작이다. 이 작업의 주인공은 걸그룹 크레용팝이 아니라, 이들을 의리있게 응원해온 아저씨 팬(‘팝저씨’)들이다. 작가는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간 카톡방을 통해 이들과 소통했고, 급기야 이들을 미술관을 무대로 한 영상 퍼포먼스에 등장시켰다. 50여 명 팝저씨의 우렁찬 ‘떼창’을 찍은 영상, 크레‘용’팝을 의식하고 만든 반짝이는 ‘용’과 현란한 조명의 빈 무대가 마련돼 있다. 그리고 팝저씨들이 헌정한 이름표와 배지들이 부착된 트레이닝복을 수건처럼 말아 크레용 셋트처럼 정렬시켜 벽에 붙인 설치 등 이들의 지극정성이 감동이다. 부성애가 전우애로 맺어져, 엉성하지만 자연발생적으로 뿜어내는 이 중년의 막무가내 열성은, 이들이 초지일관 응원해온 그룹이 처음에 거리를 전전한 무명의 ‘B’급 그룹이었던 점에서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시킨다.
주체와 대상 사이 시선의 메카니즘
이렇듯 집단성과 사회 동질성을 다루는 작가의 관심이 일찍이 일상 삶의 공간을 관찰하여 제시된 작업이 <상록타워>(2001)이다. 서울 광장동 임대아파트 상록타워의 32가구를 찍은 사진연작인데, 소위 남에게 보이고 싶은 이상적인 가정의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포착해 보여준 작업이다. 이 역시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진의 대상(인물들)이 가진 집단의식과 사회적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한국 사회 중산층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적 가정’의 전형은 그들이 사는 동일한 규모와 구조의 공간만큼이나 유사해 보인다. 획일적 아파트의 사각형 틀 속에 한껏 과시하는 가정의 행복은 그래봤자 별반 차이가 없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족의 모습은 판에 박힌 듯 행복을 연출한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까마득히 내려다볼 때 밀려오는 인간적 연민이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자세히 볼수록 집단의 획일성을 뚫고 각 가정의 개별성이 차츰 드러난다. 정연두가 다수를 다루면서도 개별적이라 보는 이유이다.
요컨대 작가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주체와 대상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시선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리얼리즘을 담고 있다. 때로 보는 이를 마비시키듯 차갑고, 상품시장의 물건처럼 대상화하고, 또는 상대를 무장시키거나 가면을 씌운다. 그의 초기작 <도쿄 브랜드 시티>(2002)는 명품 숍에서 일하는 점원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촬영한 10점의 사진연작이다. 상품시장에서 작동하는 시선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것이 유발하는 조소, 위선, 긴장 등의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소비문화로 가득 찬 대도시 공간을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그것이 다른 문화와 교차될 때 더욱 힘겨워진다. 그의 연속 사진작업 <여섯 지점(Six Points)>(2010)은 이러한 다문화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삶을 빗대어 뉴욕의 여섯 구역에 사는 다양한 민족별 소수자의 대형 파노라마 영상을 보여준다. 커다란 스케일로 연속장면에 펼쳐진 도시 공간 속 개인들의 모습은 강한 명암의 대조로 인해 더욱 고립적으로 보인다. 밝은 햇빛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인물들은 개별적으로 도드라지고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시선은 하나의 시점으로 집결된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길게 늘이는 영상기법으로, 익숙한 도시의 거리를 낯설게 만든다.
이 주체(작가)의 시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나 제각기 힘겹게 살아가는 개인 존재의 중요성을 설득당한다. 그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주의가 가진 불통과 소외,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의 고독감을 지극히 실제적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 독백하듯 들리는 남저음 내레이션에 이민자들의 애환을 곁들인다. 이 작업에서 보는 리얼리즘은 수많은 인물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명확하고 개인적이다. 낯선 풍경 속 인물들은 초현실적으로 정적이며 고독해 보인다. 여섯 군데의 다른 지역 속 인물들과 오브제들이 이음새 없이 연속된 하나의 세계는 작가가 각고의 노력을 들인 4년 동안의 결과물이다. 천천히 돌아가는 파노라마 영상은 밝은 스포트라이트로 조명한 거리의 장면을 미세한 간격으로 찍은 수백 장의 컷을 합성하여 구성한 장면인 것이다. 정연두 사진의 제작 과정은 놀랄 정도로 전문적이고 고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작가는 때로 이미지의 연출, 미장센의 조작을 그대로 드러낸다. 실제의 장면이 편집되지 않은 채 노출되지만, 최종적인 사진의 가시적 결과는 기막히게 매끈하다. 그러고 보면, 이 작가의 궁극적 관심은 가상과 실재의 관계라 봐야 할 것이다. 그 관계가 만난 사진의 글로시한 표면이 경쾌하고 가볍다. 그러나 그 표면을 받치는 보이지 않는 덩어리의 중량감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정연두의 작업은 무겁거나 혹은 가볍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