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Anxiety and Desire 류인 작고 15주기 기념 개인전

 

요절과 천재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붙는 조각가 류인(1956~1999).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주년을 맞았다. 故 류인은 김복진에서 권진규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구상조각의 계보를 잇는 조각가다. 사실주의적인 인체형상을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조형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인간 내면의 본질을 담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Anxiety and Desire>이라는 타이틀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1월 20일부터 4월 19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초 공개작에 이르기까지 생전에 그가 창조한 작품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

류인이라는 조각적 사건

김종길 미술비평

형상조각이 공간과 장소의 성격을 뒤흔들고 급기야 그 성격마저 미학적 개념으로 변화시킨 대표적 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일 것이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조각이 서 있는 그 장소의 상징이고, 칼레시市를 재사유하게 하는 예술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세우기 위해 좌대를 두지 않았다. 로잘린 크라우스가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이라 말하며 무위계성無位階性, 무위상성無位相性의 현대조각을 로댕에게서 찾은 이유다. 그의 조각은 그렇게 대지 위에서 인간과 눈 맞춤하며 가장 인간적인 현실주의 미학과 만났고, 새로운 형상조각론의 출현을 예고했다.

 FRP 철350×130×228cm 1993

<부활-조용한 새벽> FRP 철350×130×228cm 1993

< Their Attributes > 철 브론즈188×325×85cm 1995

조각의 혼(魂), 몰입과 감동의 거리
류인의 조각에서 로댕의 무위계적, 무위상적인 조각정신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조각들 또한 좌대 위가 아니라 대지 위에 섰을 때 그 미학적 상징어가 파닥거리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이하 아라리오)에 들어찬 그의 조각들은 갤러리 공간의 여백까지 밀도를 한껏 높이는 조형적 에너지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낯선 추상적 공간이었을 것이 분명한 갤러리 공간이 그의 조각들과 만나서 통감각적 체험의 구체적 장소들로 변환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공간이 조각에 장소성을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듯 조각이 공간을 곧장 ‘장소화’ 해버리는 이런 미학적 사태는 흔치 않다. 도대체 류인 조각의 무엇이 이런 사태 즉 ‘조각적 사건’을 형성하는 것일까?
작고 15주기를 맞아 기획된 <불안 그리고 욕망>전은 추모전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운 전시지만 그동안 우리가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류인을 인식했거나 그렇게 인식했던 것의 신화적 관념을 고착시키지 않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2004년 모란미술관에서 기획한 작고 5주기 추모전과 달리 이번 전시는 ‘15년’이라는 시간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조각의 존재론적 현상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다. 안타까운 요절에의 추모가 끝나고 그와 그의 조각을 차분히,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다시 주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는 ‘시간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그 어떤 실체, 진리, 상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아라리오 전시장을 채운 류인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전시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혼의 미학’으로서의 격정적 조각미와 달리 조각들이 조각작품으로 보이는, 오롯이 인간 류인이면서 조각가 류인이고 그래서 그의 조각이 순수하게 인간의 조각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연출했다. 그것은 마치 연극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보여준 이른바 소외효과疏外效果 alienation effect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이자 비평가인 ‘나’를 몰입과 감동의 지점으로부터 일정 거리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주제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도록 유인하는 전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것은 누구의 전략이었을까? 큐레이터일까, 아니면 15년 전에 작고한 류인이었을까?
이번 전시 <불안 그리고 욕망>은 우리를 다시 류인의 앞자리에 불러 세운다. 그 자신을, 그가 세운 조형론의 피고인이자 피의자로 소환해 놓은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낯설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왜 그의 조각들이 자연의 신화와 이종교호異種交互하면서 인간의 조각으로 세워졌는지, 또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조형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전체적 조형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지를 묻는다. 어쩌면 바로 그 부분에 “공간을 ‘장소화’하는 조각”으로서의 샤먼적 토테미즘이 있을 것이고 조각적 사건의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
호해壺孩는 단지에서 나온 수로왕이요, 마란馬卵은 말 곁의 알에서 탄생한 혁거세의 탄생신화다. 혁거세가 나고 5년 뒤, 용이 알영의 우물에 나타나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류인의 <아들의 하늘>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알을 깨고 일어선 아버지가 한 손은 깨어 나오는 알을 딛고, 한 손으론 아들의 알을 받치고 있다. <지각의 주>는 <아들의 하늘>과 이어지는 미학적 구조를 갖는다. <지각의 주>는 다만 알이 아니라 생명 탄생의 모반이 대지일 뿐이다. 이러한 탄생신화의 원형에 대해 미술평론가 최태만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아브락사스Abraxas의 상징을 빗대어 분석하기도 했다.
용龍은 신화 속 상상이어서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섯 동물의 부분을 조합해서 용을 그렸으나 사실 그 실체를 변태變態에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될 때 빛(번개)이 터진다. 용의 실체는 빛光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욕망에 휩싸여 있어서 쉽게 용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불안, 인간의 욕망은 그래서 일그러진 이무기일 뿐이다. <지각의 주>가 빛龍으로 깨어나는 ‘참나眞我’로서의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숨소리Ⅱ>는 다다르지 못하는 이무기(욕망)의 한계상황을 드러낸다. 거대한 뱀의 입에서 토해지듯 솟구치는 벌거벗은 육체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지각의 주>에서 <입산>까지의 연작에는 ‘몸뚱이로서의 나’인 육체적 ‘몸나’에서 ‘참된 나’로서의 ‘참나’로 변태하고자 하는 작가의 미학적 열망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인체만이 아니라 입방체로 등장하는 구조들의 상징에서 명확해진다. <입산Ⅱ>-업, <윤의 변Ⅱ>-무한의 고통, <정전>- 번뇌 해탈, <그와의 약속>-참나…. 이런 상징구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령(嶺)이 그의 화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1990년대는 1980년대와 달리 너무나 다른 시대적 상황이 펼쳐졌다.
그의 이른 죽음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했던 현실. <급행열차-시대의 변>, <황색음-묻혔던 숲>, <부활-조용한 새벽> 등은 삶의 현실이 아니라 상징어로서의 시대와 역사를 묻고자 했던 작품들이다. 그는 1990년대의 시간을 온통 그 두 가지 테제를 조각을 통해 물었다. 그 이전의 조각들이 그 자체로 사건이 되는 신화요 조각이었다면, 1990년대의 작품들은 21세기를 묻는 화두였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조각이 새롭게 던지는 예지적 전망들을 살필 수 있다. 아라리오에서 그의 작품들은 완전히 현존 상태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과거의 실존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 내 존재”로서 조각의 미학적 언어를 터뜨리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류인이 남긴 아주 오래된 조각적 화두일지도 모른다. 그 화두를 인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전시의 사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