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focus] Shirin Neshat
Shirin Neshat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 1957~)의 작업은 바로 그녀의 일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 출신으로 이슬람 문화권 영향하에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이주한 쉬린 네샤트의 작업은 이란의 정치, 역사, 그리고 이슬람 여성문제 등을 폭넓게 다룬다.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이 4월 1일부터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영상, 사진작업 50여 점이 소개된다. 이를 계기로 《월간미술》은 쉬린 네샤트의 육성으로 그녀의 작업세계를 들어보고 이와 함께 이번 전시의 의미를 살펴본다.
이슬람 디아스포라 여성작가의 교훈주의와 상징주의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조교수
이란 디아스포라 작가인 쉬린 네샤트는 1990년대 중반부터 현대예술계에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해 온 인물이다. 2010년 간행된 네샤트의 작품세계에 대한 카탈로그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아서 단토 등이 보낸 비평적 성찬, 2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격동(Rapture)>(1998)의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첫 장편영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2009)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등은 그의 국제적 명성을 입증하는 일부일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전 이후에 여는 첫 번째 개인전 대상으로 네샤트를 선정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슬람 여성이 처한 억압적 조건들을 주제적, 형식적 일관성을 갖고 표현해 온 그의 작품세계가 서구예술계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샤트의 사진과 영상설치 작품들을 엮어주는 두 개의 키워드는 교훈주의(didacticism)와 상징주의(symbolism)이다. 교훈주의는 이 작품들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근본주의가 부과한 억압적 성차별주의와 서구적 고정관념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힌 이슬람 여성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전지구적 예술시장에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음을 뜻한다. 상징주의는 이러한 이중구속의 국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네샤트의 작품들이 공유하고 변주하는 구조와 수사법들의 상징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징성을 네샤트는 사진 작업에서는 시각적 요소들의 강렬한 충돌을 통해, 영상작업에서는 두 개의 스크린 분리와 병치를 통해 구현해왔다.
네샤트의 흑백사진작품으로는 초기작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1993~97) 연작과 최근작에 속하는 <왕서(王書), The Book of Kings)(2010)들을 볼 수 있다. 네샤트의 이름을 최초로 각인시킨 <알라의 여인>의 사진들은 이란 여성들의 손과 발의 클로즈업, 또는 히잡을 착용하고 총으로 무장한 여성의 정면 얼굴의 클로즈업을 제시한다. 신체의 표면에는 이란의 현대시인 포러흐 파록자드와 타헤레 사파르자데의 여성주의적 시구들이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로 각인되어 있다. 이 일련의 이미지들에서 유기적 신체와 비유기적 총 사이의 충돌, 이슬람 사회에서 노출이 용인된 신체 부분들인 눈, 손, 발의 가시성과 가리워진 신체의 비가시성 사이의 대립,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긴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뚜렷한 도상적 가치를 정서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이중성들은 이슬람 여성에게 부과된 이슬람근본주의와 서구적 편견에 대항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들이다. 한편으로 히잡으로 가리워진 여성의 신체는 이슬람근본주의적 혁명의 폭력성과 종교적 권위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인물들의 도발적인 정면 시선과 파편화된 몸, 총은 비서구 여성을 수동적인 볼거리의 대상 또는 핍박받는 희생자로 구획하는 서구적 응시에 대한 도전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뚜렷한 페르시아어 서체는 이슬람 문화의 신화적 과거와 오늘날 이란의 정치적 긴박함을 모두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현대 이란 젊은이들의 얼굴 표정에 드러나는 정서적 강렬함을 표현한 초상사진 연작인 <왕서>에서도 반복된다.
이슬람 성정치학적 논제들의 시각적 형상화
네샤트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인증한 작품들은 흑백의 영상 설치작품 3부작인 <격동>, <환희(Rapture)>(1999), <열정(Fervour)>(2000)이다. 이 작품들 이전까지 내러티브가 배제되고 모니터의 조형적 배치에 의존한 비디오작업을 하던 네샤트는 이 3부작에서 영화적 편집과 내러티브를 전면적으로 차용하고 변형함으로써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게 된다. 이 작품들은 모두 16mm로 촬영되었으며 다리우스 콘쥐 등의 촬영기사와 필립 글래스 등의 음악 등 극장용 예술영화의 제작 시스템에 의존하기도 했다. 레이몽 벨루르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2채널 설치를 공통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들은 영화사에서 대화 장면과 시점 쇼트, 나아가 두 개 이상의 사건들의 시간적 동시성과 상징적 연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발달해 온 평행편집의 논리를 갤러리 설치공간으로 연장시킨 결과다. 평행편집에 대한 의존은 그만큼 이 작품들이 적어도 복수적인 이미지 트랙들의 편집과 스크린 공간의 배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명료하다는 점을 뜻한다. 남성과 여성을 스크린 단위에서 분리시키고 관객들에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몽타주를 촉구하는 설치방식은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전통적으로 상정한 남녀 분리라는 성정치학적 논제들을 시각적이고 개념적으로 형상화한다. 배우들의 퍼포먼스와 의상 또한 이러한 대립주의에 상응한다. <격동>에서 남자가수는 흰 셔츠를 입고 청중을 뒤편에 두고 13세기 이란의 시를 가사로 한 열정적인 사랑 노래를 부르며, 여자가수는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아무런 청중 없이 노래한다. <환희>에서 흰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성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동안 검은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은 광야를 떠돌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열정>에서 동일한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두 남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네샤트의 대립주의는 스크린 배치의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격동>과 <환희>에서 남성과 여성의 행위는 서로를 바라보는 일종의 쇼트-역쇼트 구조로 전개된다. <격동>에서는 한쪽 스크린에서 남자가수가 노래를 하는 동안 다른 스크린에서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다가, 이 남자가수가 노래를 마치고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는 동안 여자가수가 얼굴을 드러내고 노래를 하게 된다. <환희>에서 남성들의 종교적 응시는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모습과 병치되며, 이후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을 남성들이 성벽에 머무른 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대비들은 관람자가 두 개의 이미지 트랙을 일종의 시점 쇼트로 상징적으로 연결시킬 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격동>과 <환희>는 두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로 귀결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시선 교환이 동일한 극적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슬람의 전통적 여성 자아와 현대적 여성 자아를 대면시킨 2채널 작품인 <독백(Soliloquy)>(1999)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교환과 대조적이다). 이때 두 스크린 사이의 공간은 이슬람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의 환원불가능한 차이(<격동>에서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시청각적 차이, <환희>에서 이슬람 전통에 구속된 남자들과 이를 벗어나려는 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개인전은 네샤트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교훈주의와 상징주의의 면모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전시다. 이러한 면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관람객의 판단으로 남는다. 네샤트는 일련의 강연 및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드러내는 뚜렷한 이분법들이 이슬람 여성에 대한 억압적 상황들을 유지시키는 문화적, 정치적 대립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주장해왔다, 이러한 이분법들이 한편으로는 비서구 하위주체들의 타자성과 혁명 이후 이란 사회의 견고한 보수성을 그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 대중에게 알게 쉽게 이해시키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이 담보할 수밖에 없는 환원주의적 단순성, 그리고 비서구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를 상징주의적으로 전달할 때 수반되는 자기-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의 한계 또한 네샤트의 작품들을 비판적으로 관람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다.
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설치방식에서 보완해야 할 점 한 가지를 지적한다. 네샤트의 작품에서 사운드는 이미지 트랙만큼이나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필립 글래스의 섬세한 미니멀리즘 스코어를 들을 수 있는 <패시지(Passage)>(2001)가 아니더라도, <격동>에서 서로 대비되는 남자가수와 여자가수의 목소리(분명한 가사와 청중을 가진 남자가수의 노래, 그리고 남성중심의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여성적 타자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여자가수의 독백적인 노래)는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하며, <열정>에서 남성 종교지도자의 연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르면 ‘오페라와 같은 음악적 성질’을 띤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들 속에 여러 작품을 설치하다보니 개별 작품의 볼륨이 너무나 낮으며, 작품들 사이의 사운드 간섭 또한 문제점으로 남는다. 이후 전시에서도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을 비중있게 구현하게 될 미술관 측에서 세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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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 네샤트,
뉴욕에서 만나다
날짜 3월 19일 | 장소 뉴욕 소호의 쉬린 네샤트 작업실
인터뷰이 쉬린 네샤트 작가 | 인터뷰어 김유연 독립기획자
김유연(이하 ‘김’) 1993년 뉴욕 프랭클린 퍼니스에서 당신의 개인전 <알라의 여인(Women Of Allah)>을 보았다. 당시 여성의 얼굴과 발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그 위로 텍스트가 영사된 장면이 지금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폭력의 의미와 역사적 유산의 상징이 함축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당시 전시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이러한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중동 여성을 향한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서구의 시각과 이슬람 내부에서 보는 시각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네샤트(이하 ‘쉬린’) 당신은 그 전시를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 쇼는 내 첫 번째 전시였다. 1990년대에 다시 이란에 돌아간 이후 <알라의 여인>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매우 나빴고 이란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주했고, 당시 내 작업이 마음에 들지않아 더 이상 예술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알다시피, 나의 남편인 박경(Kyung Park)과 함께 뉴욕 Storefront for Art in Architecture 비영리기관을 운영하는 데 주력을 다했다. <알라의 여인>은 처음 이란으로 돌아간 뒤에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일어났던 이슬람혁명의 여파와 이란의 상황으로 인해 국가의 변형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여성의 위치와 예전의 이란이 페르시아 및 이슬람화해 있었던 상황에 주목했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혁명 후의 주요 개념에 대한 이해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이 주제가 매우 심오한 의미를 가진 주제임을 깨달았고 다행히 외부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였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은 흥미있는 주제를 주축으로 노력하는 학자나 사회주의자와 다름없었다. 나에게는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사이를 중재해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었고 그것이 테러리스트이거나 폭력적이거나 전투적인 여자라면, 모든 것이 훨씬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알라의 여인>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의 전투적 여성에 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이미지의 시리즈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 촬영되던지 간에, 구성 요소들의 완벽한 이분법성, 미와 감성, 에로티시즘의 역설, 강하게 양식화된 흑백이미지를 항상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폭력, 잔인성, 압력의 제안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이미지는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 나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역설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알라의 여인>이 종교와 사람들에게 인해 세뇌당하는 과정,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들과 신(神) 사이에서 가두어진 방식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구이다.
김 1998년에 당신은 세상이 놀랄 만한 영상설치작업 <격동(Turbulent)>을 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두 개의 비디오작업 <환희(Rapture)>(1999)와, <열정(Fervour)>(2000)을 제작한다. <격동>은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설치는 성과 사회, 그룹과 연관된 개인에 관한 변증법을 보여주기 위해, 양 채널 비디오 스크린을 이용했다. 이란 출신 망명작가로서 서구적 측면과 이란과 이슬람문화의 문제점, 특히 이슬람법에 의해 제한받는 이슬람 여성의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어려웠던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쉬린 1993~1997년 사이에 완성한 <알라의 여인> 이후, 1998년부터 나는 사진작업에 대해 좌절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가 다뤄왔던 테마와 주제들에 지쳐있었다. 이란 정부와의 문제로, 더 이상 자유롭게 이란에 갈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에게 <격동>은 매우 혁신적인 작업이다. 이는 형식적 매체를 사진에서 영상으로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에서 영상은 비록 흑백사진과 매우 흡사하지만, 유동적이고 서술적이며 음악과 구성이 내재돼 있었다. 여기에 나는 풍경, 안무, 음악, 퍼포먼스를 포함하였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적 언어를 위한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주제별로
<격동>과 함께 <알라의 여인>에서 나의 관점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이려고 노력했고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본 실제상황을 관찰했다. 하지만 <격동>에서 작품은 더욱 비평적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리고 이란 내부의 억압에 대해서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최근까지 나는 이란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나의 작업은 점점 더 비판적이 되었고 여전히 예술적이고 우화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풀어갔다. <격동>은 음악산업에서 여성 부재에 대해 집중한 작품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여성의 음악산업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남성은 좀 더 순응적인 타입의 노래를 하고 예상 가능한 해답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중 없이 노래하는 여성은 음악에 대한 당국의 규칙을 언제든지 깰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소리, 우수에 젖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는 여성이 처한 선택권이 없고 소외된 환경과 상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훨씬 거칠고 강하기 때문에 매력적이고 실험적이기도 하다.
김 2001년에 당신은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와 함께 <패시지(Passage)>라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의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약에 이 작업을 만드는 데 당신과 필립이 직면했던 문제점이나 절충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두 명의 예술가가 아주 다른 시각으로 접근 한 것같다.
쉬린 수잔과 쇼자 등 이란인들로 이루어진 팀과 수잔의 목소리 영상작업을 만든 후에, 나는 갑자기 필립 글래스의 사무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는 몇몇 영화감독에게 배경음악을 작곡할 단편 필름을 맡기고 있었다. 한 명은 마이클 루브너(Michal Rovner) 감독이었고, 피터 그린어웨이(Peter Greenaway) 감독, 아톰 에고얀(Atom Egoyan) 감독, 고프리 레지오(Godfrey Reggio) 감독 등이었다. 이것은 굉장한 기회였다. 나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그에게 제안했다. 나는 모로코로 촬영을 하러 갔고 그가 어떠한 음악이나 악기를 이용할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허구적이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나의 작업은 아랍적인 요소가 강하고 <패시지>의 주제는 애도와 장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란여성인 수잔과 작업한 이후, 어떻게 내가 미니멀한 음악을 하는 서양의 백인 남성과 같이 일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콜라보레이션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사실 내가 기획한 음악에 흡족했다. 우리가 꼭 이란인과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굉장한 발견이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어도, 아이디어의 토대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얼마든지 같이 일할 수 있다. 나는 또한 목소리가 아닌, 소리와 음악만으로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필립 글래스와 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후, 류이치 사카모토(Ryuich Sakamoto)라는 작곡가와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이라는 작업을 하게 된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한 것은 굉장한 협업이었고 나와 음악의 관계, 콜라보레이션 등에서 중요한 돌파구였다고 느낀다. 진실된 작업을 위해서 모국 출신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의 지평선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김 2002년에 당신은 독일 ‘카셀 도쿠멘타11’ 지원으로 <새들의 논리(Logic of The Birds)>를 완성하고, 같은 해에 <투바(Tooba)>를 만들었다. 대부분 작품처럼, 이것은 시적인 알레고리와 마술적인 리얼리즘의 형태를 조합한다. 그리고 당신 작품은 페르시안 작가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의 여성성 나무(a feminine tree), 투바(Tooba), 파라다이스의 나무(tree of Paradise)가 중심이 되는《 여자들만의 세상(Women Without Men)》에서 영감을 받았다. 나무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종교적인 상징을 갖는다. 유대인 탄생 신화의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에는 도교적인 전통에서 신성한 복숭아와 마찬가지로 불멸의 의미가 부여된다. 불교적 전통에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다. 페르시안 전통에서 나무가 갖는 상징성과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필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관련을 갖게 되는지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는가?
쉬린 <투바>는 멕시코에서 촬영했다. 그 필름을 찍기 전 2001년 9월 11일 9·11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2년 봄이었다. 나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중동으로 돌아가 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이 시기에 적합하지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작업이 그 어떤 것보다 9·11 참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이 작품은 시적이고 메타포이다. 투바의 나무는 코란에 존재하는 신화적 대상이다. 파라다이스의 나무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나무이다. 그래서 여성성을 대표하기 위하여 파라다이스의 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이란과 풍경이 유사한 와하카라는 곳의 풍경에 이 나무를 배치시키기로 했다. 그곳에는 척박한 언덕이 있었다. 우리는 언덕 중간에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나무로 둘러싸인 벽을 만들었고 이것은 나무와 관계가 형성되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투바 나무 주변의 정원을 은신처로 삼으려는 무리, 남성과 여성에게, 그것은 절대적으로 신성시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종교의례와 성가를 부르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있다. 나에게는, 비록 이것이 허구적이라 하여도, 이들에게서 영감을 받으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유대인이거나 힌두교인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된다. 그들의 동작에는 강렬함이 있었고 그들이 옷을 입은 방식은 매우 모호하지만 명백히 힘이 있고 종교적이었다.
김 그것은 파라다이스로의 여정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쉬린 정확한 말이다. 그것은 마치 오아시스, 안식처를 찾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9·11사태를 돌이켜볼 때와 같이, 사람들이 느꼈을 상처와 불안전성의 양면을 뜻한다. 세계적으로, 우리는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고 안전한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시적인 연극방식에서 인간이라는 무리는 항상 안전하게 보이는 나무 아래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무라는 성스러운 곳에 도달하자마자 나무, 투바(Tooba)는 사라진다. 점령함으로써 성스러운 장소를 상실한다. 이것은 지극히 이란적이며, 이 점에서 나는 이란 문학에 찬사를 보낸다.
김 지난 몇 십 년 동안 당신은 여러 분야에 걸쳐 사진, 필름, 비디오 설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작업하였다. 당신의 첫 번째 영화 필름 <여자들만의 세상>(2009)은 독일 헤센 지방의 영화제에서 평화특별상과 66회 베니스영화제(2009)에서 은사자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무엇이 당신을 이러한 영화필름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들었으며, 어떻게 발전했는가?
쉬린 2003년 <투바>를 만들고 나서, 나는 약간 지쳐 있었다. 그전에는 매체가 사진이었던 반면, 지금은 영상으로 바뀌었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간 완전히 다른 것을 해야 할 시기라고 느꼈다. 현재까지 나는 여러 편의 영상을 만들었고,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나는 절친인 쇼자, 그리고 영화계에서 온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나는 수많은 영화를 보았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 영화로 인해,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일을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고 아직 두려웠다. 2002년인가 2003년의 어느 순간, 내가 도쿠멘타(Document)에 나갔을 때, 내 생각에 2002년 <투바>를 출품했을 때인 것 같다. 나는 미술계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내가 떠나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영화로 만들고 싶은 스토리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샤누시 파시퍼가 쓴《여자들만의 세상》을 찾았다. (샤누시 파시퍼(Shahrnush Parsipur)는 1946년 2월 17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1980년대 말에, 파시퍼는 그녀 이야기와 관련해 다수의 출판사와 잡지《 Donya-ye Sokhan》과의 인터뷰 등으로 테헤란 문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은 4년7개월간의 감옥 생활 이후에 쓴《 투바와 밤의 의미-1989(Touba va ma’na-ye Shab)》였다. 감금 이후, 1990년에 그녀는 단편소설을 출판했다. 파시퍼가 1970년대 말 집필을 끝낸《 여자들만의 세상(Zanan Bedun-e Mardan)》과 같은 연작을 재출판. 첫 번째 챕터는《 Alefba, no. 5》(1974) 이다. 이란 정부는 1990년대 중반에《 여자들만의 세상》을 판금 조치하고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1990년대 초반, 파시퍼는 네 번째 소설인 450페이지 분량의 여성 돈키호테에 관한《 푸른색의 이유(Aql-e abi’rang)》를 완성하는데 이는 1992년 초반까지 판금되었다. 1994년 파시퍼는 미국으로 건너가《 감옥의 기억(Prison Memoire)》을 쓴다. 이는 450페이지 분량으로 그녀가 각각 다른 감옥에서 보낸 4번의 시간에 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1996년 그녀는 다섯 번째 소설을 썼는데 이는 900페이지짜리 과학소설《 Shiva》이다. 1999년에는 여섯 번째 소설인 300페이지 분량의 《나무의 정신이 가진 고통과 작은 모험(Maajerahaaye Saadeh Va Kuchake Ruhe Deraxat)》을 출판한다. 2002년 그녀는 700페이지 분량의 일곱 번째 소설《바람의 날개 위에서(Bar Baale Baad Neshastan)》를 쓴다. 그녀는 그 이후 이란을 떠나 현재는 미국에 거주한다. 브라운대학교의 국제 연구를 위한 왓슨 인스티튜트와 혁신적인 글쓰기(Creative Writing and the 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프로그램의 첫 번째 국제 작가 프로젝트 펠로십 수상자이다) 그녀는 매우 유명한 이란의 소설가인데 매우 힘든 삶을 살았고, 망명했으며, 감옥에 수감됐고 정신적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녀의 책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했고 어느 면에서는 초현실적이었다. 이란에 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이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이란문화 외부로부터 오는 경향이 있었고, 그들의 사건과 문제는 전세계의 어떠한 여성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녀가 신을 묘사하는 대목은 매우 시각적이었다. 나는 이 책이 내가 흥미를 가진 것들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점은 문학이 지닌 마술적 리얼리즘이었다. 이것은 영화로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4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쳤고, 모로코에서 촬영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대본을 다시 썼다. 2009년 2년의 수정과 4년의 글쓰기를 합해 총 6년에 걸쳐 만든 영화가 개봉되었다. 당신은 내가 그 상을 받을 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김 당신의 사진 이미지에는 당신이 직접 쓴 글이 더해진다. 이 텍스트들은 언어로서, 초상화를 넘어 시각적으로 가려진 베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쉬린 글씨체는 각기 다른 매력들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학적인 매력이다. 당신이 이것을 그래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크고 진한 글씨체의 텍스트와는 반대되는 작은 텍스트는 사진에 다른 영향을 준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그런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글 혹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이미지에 또 다른 측면의 정보 및 복합성을 제공하는 방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글의 경우, 번역되었을 때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10세기의 <왕서>에서 가져온 그림을 예로 들면, 이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이므로 그러한 혁명의 폭력적인 측면에 대한 진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진에 추가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의도를 더욱 잘 나타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김 당신의 작품은 겹의 모호성을 나타낸다. 시적이자 정치적이고 역설적이기도 하며 여성 대 남성, 전통 대 현대의 대립적인 것을 나타낸다. 당신은 사회의 역사적 뿌리를 깊이 생각하며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한다. 또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있으며, 존재와 사람의 조건에 대하여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며, 예술과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쉬린 정말 좋은 질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때때로 덜 정치적이고, 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만든다. 나는 예술세계에서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정치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게 되면 사람들은 바로 당신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균형을 유지해야 비로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설교하려고 하는, 즉 설교적인 예술로 추락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시적인 것이면서도 더욱 심원한 것, 더욱 일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나는 정치적인 예술가로 낙인찍히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예술가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란인이며 나의 조국은 정치적인 문제, 혁명 및 기타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자연히 나는 그에 반응하게 된다. 내가 스위스 출신의 예술가였더라면, 즉 내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동시에 나는 설교하지 않고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항상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 어려운 노선을 따라서 걷고자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 작품에 대하여 너무 정치적인 면만을 보고 예술적인 면을 보지 않거나, 그와 반대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때때로 좌절하기도 한다. 보도매체에서도, 즉 기자들도 실제 예술작품을 보기보다는 그 작품에 대한 정치적인 측면을 과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