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眞景山水畵 우리 강산, 우리 그림
보편성 위에 펼쳐진 고유의 독자성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진경산수화는 많은 이에게 조선의 문화 역량과 우수성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12월 14일부터 5월 10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진경산수화를 대규모로 만날 수 있는 전시, <진경산수화: 우리 강산, 우리 그림>이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정선의 서울, 금강산 그림부터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이은 심사정, 정조시대의 김홍도, 이인문을 이어 조선 말기에 활동한 근대화가들까지 이어지는 진경산수의 맥을 짚어본다. 이를 통해 조선 성리학과 우리 땅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본다.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으로는 《훈민정음》,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미인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모두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문화재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일 작품이 아닌 특정 분야를 꼽는다면, 역시 진경산수화가 아닐까 싶다. 겸재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진경산수화는 소장품 양과 수준에서 간송미술관을 따라올 곳이 없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뚜렷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진경산수화를 집중적으로 수집한 결과이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선조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결정체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화재를 모으는 것이 곧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되살리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간송 선생은 특히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올바르게 전해주고자 했다.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와 문화가 심각하게 폄하되고 왜곡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간송은 진경산수화야말로 조선 문화의 역량과 우수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간송의 뜻에 부응하여 간송미술관은 수십 년 동안 심도 있는 연구와 다양한 전시를 통해 진경산수화를 집중 조명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진경산수화는 간송 선생과 간송미술관의 신념과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참된 경지眞境로 나아가다
진경산수화는 실재하는 경관을 사생한 그림이다. 그러나 실경을 그렸다고 모두 진경산수화라 하지는 않는다. 실경산수는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와 중기에도 있었지만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렸으며, 기법도 중국의 관념산수화풍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자존적 인식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하여 이전의 실경산수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런 자존감과 독창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문화를 식물에 비유하면 이념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라 한다. 이전과 다른 꽃이 피었다면 그 바탕이 되는 뿌리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 뿌리는 다름 아닌 조선 성리학이었다. 조선 성리학은 율곡 이이에 의해 정립된 신학설로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도 없는 고유 이념이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의 뿌리에서 피어난 꽃인 셈이다. 당연히 주체적이고 독자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문화를 계승할 유일한 국가는 바로 조선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른바 조선중화주의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곧 세계문화의 중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영조시대 문인인 조구명趙龜命은 “예술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없을 진대, 어찌하여 제 스스로 중국의 문명을 기준으로 삼겠는가” 라고 갈파했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왜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진경산수화의 출현은 조선 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과 조선중화주의라는 주체적 자의식에서 움튼 조국애와 국토애가 조형적으로 발현된 현상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발전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조선 성리학의 정립자인 율곡계 문인들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겸재 정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선은 우리 산천의 조형적 본질과 내재된 정신성을 면밀한 관찰과 많은 사생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역대 중국 산수화풍의 장점을 취합한 뒤,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의 원리에 입각해 음양의 대비와 조화로 화폭에 풀어냈다. 우리 산천의 ‘진짜 경치眞景’를 사생하여 ‘참된 경지眞境’로 승화시킨 과감하고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금강산, 한양 주변의 명승,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박연폭포 등 정선이 그린 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그 진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에 의해 정립된 진경산수화풍은 다음 세대인 현재 심사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어린 시절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진경산수화풍을 좇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중국 문인화풍의 관념산수화를 더 잘 그렸다. 그러나 진경산수화의 도도한 흐름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지 중년 이후 정선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끌어들여 금강산의 명소들을 사생해낸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이 이번에 출품된 〈만폭동〉과 〈삼일포〉이다. 정선에 비해 사생성과 현장감은 다소 미흡하지만, 문인 취향의 그윽한 아취가 결합된 독특한 진경산수화풍을 보여준다.
진경산수화의 대미를 장식할 역할은 정조시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김홍도, 이인문 등 화원 화가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도 김홍도는 화원화과 특유의 시각적인 사실성을 중시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풍으로 진경산수화를 그려 앞선 문인화가들과는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한편 김홍도와 더불어 정조시대를 풍미했던 동갑내기 화가 이인문은 서양화풍이 가미된 진경산수화를 그려 독특한 감흥과 더불어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조선후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진경문화는 정조대를 넘어서며 제 수명을 다하고 스러져갔다. 진경산수화도 생명력을 잃어갔다. 진경산수화 출현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조선 성리학이 말폐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선말기 예원의 종장이었던 김정희金正喜가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은 모두 명성이 대단하지만, 한갓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절대 들춰보지 말라”한 것은 이 시기 진경산수화가 처한 입지와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몇몇 화가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간혹 그려졌지만, 대체로 과거의 전통에 안주하여 형식화하거나,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의미 없는 변주만 지속하며 박제처럼 굳어져 갔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기서金箕書, 조정규趙廷奎 등 조선 말기에 활동한 화가들과 조석진趙錫晋, 안중식安中植, 김은호金殷鎬 등 근대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도 함께 전시된다. 정선이나 단원 등 진경산수화풍의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과 비교하면 내면의 정신성을 상실한 진경산수화의 여맥과 잔해가 어떤 모습으로 조락해가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에서 근대화가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진경산수화를 망라한다. 따라서 전시 동선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시기별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일한 장소를 그린 작품들을 위주로 비교 감상하면 그 유사점과 차이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것이 조금 어렵다면, 실경과 그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나름대로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를 위해 전시장 한켠에 실경을 찍은 사진과 그림을 한 화면에서 동시에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이를 세심하게 보면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300년 전 우리 국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진경산수화의 본질적인 지향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이나,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고유의 독자성을 한껏 펼쳐보인 진경산수화가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번 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