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2014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대전으로 돌아온 이응노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이응노미술관에 기증된 고암의 작품 500여 점이 공개되는 전시가 대전 이응노미술관(2.25~6.1)에서 열린다. 고암의 회화, 조각, 판화 및 판화 원판과 유품 등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그 동안 미공개되었던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와 행적을 4개 섹션으로 나눠 살펴본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드라마틱한 생을 살았던 고암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응노미술관에 다녀왔다. 대전에 간다고 하니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을 사먹어야 한단다. KTX 대전역사(驛舍)에서 요행히 성심당를 발견하고 줄을 서서 빵을 사고 택시를 타고 이응노미술관에 도착. 개막식에 맞추어 마침 박인경 여사가 한국에 와 계셨다. 그녀와 환담을 나누며 튀김소보로를 함께 먹는 순간.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특별하게 다가왔다. 참 오랜 세대 차이가 나서, 내 머릿 속에는 이미 역사 속의 인물들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이응노와 박인경 부부. 그중 한 분은 이미 1989년. 20세기의 질곡 많은 세계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생을 마감하셨지만, 박인경 여사는 2014년 2월 바로 나의 앞자리에 앉아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를 맛있게 잡수신다. 내가 그들 인생의 끝자락 어딘가에 잠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치 나도 역사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그저 소보로빵을 함께 먹는 장면이지만.
어떤 예술가도 시대를 떠나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응노 작가를 생각하면, 특히나 한국의 역사가 그의 생애에 고스란히 겹쳐져 떠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나 1910년 경술국치 때 숙부가 조상의 묘 앞에서 자결했던 사건을 평생 기억하며 살았다. 김좌진과 유관순의 고향이기도 한 홍성 터에서 3·1운동을 경험했고, 20의 나이에 무작정 상경, 김규진 문하에서 열심히 대나무를 그렸다. 간판업을 해서 가세를 세우고 돈을 번 후에는 1935년 일본으로 유학 가 일본 남화와 서양화를 두루 공부했다. (일본에서 돈이 떨어졌을 때는 요미우리 신문배달소를 차려 친척들을 채용하고 그들의 유학까지 지원했다. 엄청나게 강인한 생활력을 소유한 가부장 시대의 남자.)
2차대전 종전 직전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아들을 잃었고(그는 후에 북으로 가서 살아있는 것으로 판명 났지만), 1949년경 박인경 여사를 만나 함께 한국에서의 피난생활을 거친 후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심지어 1964년에는 동양미술을 프랑스인에게 가르치는 학교도 세웠다. 그러던 중 1967년 거의 1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았으나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고국 땅을 밟자마자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 대전교도소, 안양교도소를 거쳐 2년 반 만에 석방됐다. 출옥 후 고향 근처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 암각화를 남기고 홀연히 프랑스로 돌아가 더욱 완숙한 예술작업을 펼쳤다. 한국에서도 작품 전시를 이어가던 중 다시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국내 작품 반입이 전면 금지된다. 이 사건의 정확한 경위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979년 박정희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던 시기,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프랑스에서 뉴스를 접하며 대작 <군중> 연작을 탄생시켰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택한 후 1987년에는 평양에 가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방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려는 시기, 전 세계적인 화해 무드 속에서 1989년 1월 1일 서울에서 대규모의 이응노 회고전이 개막했다. 그러나 열흘 후, 그러니까 1989년 1월 10일, 그는 파리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응노의 시신은 1871년 파리코뮌이 최후까지 저항하다 총살된 페르 라세즈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를 어찌 이 좁은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있으랴.
이응노미술관 신소장품전 개막식 인사말에서 박인경 여사는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압축했다. “이응노 선생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가셨습니다.”
형식, 주제, 소재, 그 무엇 하나 거칠것 없는
그는 참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 같다. 85년간의 그의 생애가 그러할 뿐 아니라 그의 작품이 또한 작가의 드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이응노는 주로 한국화를 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서예, 조각, 판화, 도자기, 태피스트리 등 갖가지 장르를 두루 넘나들었으며, 일본 유학기에는 서양화도 배웠고, 프랑스에서 10미터 높이의 공공 조각도 만들었다. 그는 한지에 먹을 주로 활용했지만, 다 쓴 신문지나 폐지, 나무, 돌, 천, 밥풀, 노끈, 부채, 달걀껍데기, 흙, 벼루 뚜껑, 바위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재료들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그러한 재료들로 그는 사군자도 치고, 소와 닭과 양, 산과 강과 마을도 그리고, 상형문자와 같은 추상의 세계를 드러내는가 하면, 무엇보다 사람, 사람들을 만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다작의 작가로 쉴 새 없이 손발을 움직였던 그는, 언제나 그리고 긋고 찢고 베고 긁고 짜고 붙이고 짓이기고 지지고 뿌리고 두드리고 굽고 새겼다. 그러니 한마디로 ,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신 것이다!
그토록 다채로운 이응노의 행적을 모두 드러내 보이기에는 어떠한 미술관도 작아 보일 것이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자그마하게 설계하여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이응노미술관의 건축 설계가 역설적으로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인 건축가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은 미술관 입구의 소나무에서부터 중정의 마구 자란 풀, 후원의 대나무에 이르기까지, 우연을 가장한 채 관람자들이 이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설계했다. 전시장 공간의 형태가 조금씩 달라보이게 한 것도, 건축 재료가 조금씩 다르게 끼어드는 것도, 이응노 작품의 다양성을 지극히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장치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응노미술관은 갈 때마다 볼 때마다 공간도 작품도 달라 보인다.
이번 전시가 특히나 의미 있는 것은 2007년 미술관 개관 이래 두 번째의 대규모 소장품 전시라는 점이다. 2013년 초에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주로 박인경 여사를 통해 기증된 533점의 작품을 정리하고 전시했으며 큰 도록도 함께 출간했다. 올해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비슷한 경로로 수집된 697점의 작품을 대부분 전시했다. 다 걸 수 없는 작품들은 영상실에서 이미지로나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응노미술관에서는 이제 총 1230점에 달하는 소장품과 많은 아카이브를 체계적으로 정리·관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방법을 고민하는 학술 심포지엄도 함께 열었다.
지난해 전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서예, 동물화, 사군자, 추상, 판화 원판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옥중화(獄中畵)일 것이다. 이응노의 출옥 장면을 담은 그 흑백사진 속에서 한쪽 팔에 끼어 있던 뭉툭한 꾸러미. 바로 그 꾸러미에 들어있던 그림들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인가. 거의 반추상화되어 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형상들이 화면 위를 부유한다. 차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들…. 어찌 보면 마치 분노와 환희가 공존하는 것 같다.
개막식에서 박인경 여사의 인사말은 간결했다.
“이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에는 온통 ‘대전’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 대전에 이렇게 작품이 와서 걸렸습니다.”
이응노는 작품 옆에 ‘대전교도소에서’라는 말 대신 그저 ‘대전에서’라고만 써두었다. 교도소에서일망정 그래도 고향 근처 대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던 것일까? 그는 실제로 후에 “감옥은 나의 학교였다”고 말했다. 밥풀이 질긴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도, 그것으로 장기 두는 말을 만들어 쓰던 옥중의 동료들이었으니까. 무엇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일상의 행위가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도 그는 감옥에서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대전교도소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프랑스 파리를 거쳐 이제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짧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일 것이다.
박인경 여사의 짧은 인사말은 이렇게 끝났다. “이제는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그 많은 이응노의 작품을 프랑스에 남겨두지 않고 고국으로, 대전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 여전히 그녀는 애쓰고 있다. 바로 주인공인 우리들을 위해! 전시 보러 대전에 한번 가보자. 2014년의 따사로운 봄날, 1956년 개점한 성심당의 튀김소보로와 부추빵도 사먹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