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그룹 뮌 – 기억극장
Memory Theater
김민선(사진 왼쪽)과 최문선으로 구성된 부부작가 그룹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3.20~5.30)이 열린다.
전시 타이틀이 말하듯 이번 전시에서 뮌은 ‘기억’과 ‘극장’을 주목한다.
즉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인 차원에서 기억이라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요소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에만 놓여있지 않은 ‘기억’이 매체를 통해, 그리고 매체에 어떻게 놓여있는지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물성과 이질성, 미디어아트의 분더캄머
강수미 미학, 동덕여대 교수
기억은 당신의 내부 어딘가만이 아니라 사물/사태에도 저장돼 있다. 당신이 이전에 갔던 어느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문득 생각나는 ‘잊고 있던 장면’이나, 만졌던 어떤 물건을 발견했을 때 떠오르는 ‘옛일의 잔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장소나 물건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신이 지나간 흔적이, 당신이 매만졌던 자국이 그것들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바르부르크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라는 이름 아래 수천의 이미지를 수집했을 때, 벤야민이 기억을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체험된 것의 매체’라고 정의할 때, 그 기본적 인식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사물/사태들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논할 미디어아티스트 뮌(Mioon)의 작업을 통해 말하자면, 아티스트인 당신이 몇 년 전 참가했던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작업실 어딘가에 당신의 행위로 남은 흔적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또 크리스마스 때 트리를 장식했던 붉은 구슬장식은 당신의 손톱에 긁힌 자국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듯 물리적 차원에서 물질의 몸체에 저장된 기억은 종종, 인간의 머릿속이나 마음에 떠오르는 추상적 기억보다 훨씬 구체적인 지각과 감정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일종의 미디어이다. 생리학적 의미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기억과는 달리, 그것들은 생생한 물리적 현존으로 그와 연관된 이들의 느낌, 정서, 의식을 깨우고, 불러 모으고, 여기서 저기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의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현재 공간이나 사물의 흔적 또는 자국으로 제시함으로써 선형적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그리움이나 회한을 일으킬 수 있다. 혹은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의 감각이나 판단을 재생산하고 나아가 새롭게 조직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지나가버렸지만 그 장소나 물건이 지금 여기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이런 맥락에서, 물질을 기반으로 시각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는 미술만큼 기억의 미디어로서 효과적인 것도 드물다. 사물의 현존을 즉자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설치미술과 기술공학적으로 시공간의 질서를 조작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 그리고 그 둘의 결합 형태 전시라면 특히 그렇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린 뮌의 개인전 <기억극장>이 미술관 관람객 개개인의 내밀한 미적 경험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공감을 얻는 조건도 이와 관련해 볼 수 있다. 핵심만 먼저 말하자면, 뮌의 <기억극장전>은 기억을 공간과 사물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형상화하고, 그 차원에서 감상자와 전시작품이 상호 매개될 통로를 구축했다(도록 글 가운데 이 전시는 “보통 ‘기억’에서 요청하는 서사나 이미지들을 찾기란 힘들다”고 단언한 김남수의 관점은 인간중심적 사고 범주에서 기억을 규정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사적으로 전유하면서도 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감각 지각의 장(場)을 생성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안 어느 구석에나 방치돼 있는 유행 지난 장식품이나 장난감,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찍었으나 오래된 앨범 안쪽에 묻혀있고 컴퓨터 파일 중 하나로 축소된 사진들, 분명 이유가 있어 거기 그렇게 놔뒀는데 까맣게 잊고 지낸 비닐봉지 속 정체 모를 물체들. 이것들은 나만의 것이지만 또한 누구나의 삶에 엇비슷한 경험과 기억의 대상으로 잔존하는 사물들이다. 뮌은 그처럼 일시적 경험의 때가 묻어있고 다종다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잔재들을 아상블라주해서 빛과 그림자의 유희로 가득 찬 캐비닛(<오디토리엄(Template A- Z)>)을 만들었다. 또 그 잔재들로 유년의 추억과 청장년의 회한이 얽힌 크리스마스트리 형태의 구경꾼상자(<오프 스테이지>), 전시장 귀퉁이 전기 콘센트에 연결된 채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다만 알 수 없는 말소리만 흘려보내는 흰색 봉지(<독자의 극장>) 작품을 제시했다. 폭 7미터, 높이 3.2미터의 거대한 크기의 설치작품 <오디토리엄>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 백과사전적 수집을 통해 탐욕스러운 호기심을 충족시켰던 이들의 분더캄머(Wunderkammer)처럼 미술관 관람객 주위를 감싸고 돌며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다섯 가족의 기억을 장식 형태로 매달고 있는 <오프 스테이지>는, 마치 19세기 카이저파노라마를 보듯이, 의자에 앉아 사각형 상자를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로 관객 개인과 익명의 가정사를 내밀하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작가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레지던시 경험에서 연유한 <독자의 극장>은 작은 비닐봉지 속의 소형녹음기가 이방의 언어(네덜란드와 아프리카의 혼혈어)를 전시장 저층부로 흘려보내며 마치 무의식에 억압된 기억의 소음처럼 감상자의 신경을 두드린다. <커튼 콜>은 또 어떤가? 미술관의 건축구조를 살려, 10미터 길이의 통로 형태 허공에 설치한 세 겹의 붉은색 커튼들이 열리고 닫히며 언뜻언뜻 인형의 깜빡이는 눈을 보여주는 영상설치작품. 그것은 어렸을 때 내가 인형을 좋아라 가지고 놀다 문득 이유 없이 느낀 무서움, 그 기이한 체험의 순간을 다 커버린 내 머릿속에 반복 상연시킨다. 커튼의 개폐처럼 의식 위로 드러냈다 감췄다 하면서.
뮌의 <기억극장전>이 이상과 같은 리뷰를 가능하게 하는 지점은 각 전시작이 단지 공허한 조형적 오브제로만 놓여있지 않아서고, 예술적 개념이나 서사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다. 작품들은 앞서 썼듯이 개인적 기억의 환기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물질적 조건을 갖췄으되, 심미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넘어 작용한다. 또 역으로 작가가 기억을 집단의 상황극이나 가정 내의 대소사로 정의하는 데서부터 사적-집단적 경험이 교환되는 방식 등을 건드리는 데까지 작품 외적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작품의 물질적 현존을 짓누르지 않는다. 그 점에서 뮌의 최근 작업은 잡다한 물질과 하이-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감각 지각적 의미를 가진 사물이자 보고 만질 수 있는 질료를 가진 의미로서 미디어아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질성의 미디어아트로
그런데 뮌, 이제야 밝히지만 김민선과 최문선 두 사람으로 이뤄진 이 작가그룹의 미디어아트에서 물질 및 물리적 기술이 처음부터 이와 같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뮌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2006년부터 꾸준히 미디어기술과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설치미술을 국내 미술계에 선보여왔다. 아마도 많은 이가 흰 깃털을 이어 붙여 만든 스크린 위에 이집트 피라미드나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전경이 투사되는 작품 <관광객 프로젝트>(2003)를 뮌의 대표작으로 기억할 것이다. 또 박수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이미지를 400개의 홀로그램 판에 담아 원형극장 형태로 구축한 <홀로오디언스(Holoaudi-ence)>(2005)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감상자도 꽤 될 것이다. 이렇게 예로 든 뮌의 이전 작품들은 글로벌리즘의 관광산업에 대한 비판적 접근, 무대와 객석이라는 이원구조를 뒤집어 봄으로써 주체와 타자 관계에 대한 재고를 주제로 삼은 것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별도로, 사실 감상자 입장에서는 작품의 설치 효과 및 장치로서의 기계적 작동에 더 매혹되고, 더 감탄하게 됐던 미디어아트다. 그러니까 이때 뮌의 작품들은 작가 입장에서 일종의 메시지나 발언을 비중 있게 다루고자 했더라도, 수용자는 작품의 스펙터클과 표피적 자극에 매혹(현혹)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양상은 2009년 작인 <우연한 규칙>에까지 이어진다. 인터랙션 영상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주식시장의 데이터 변화에 실시간 반응하는 전자나무 숲은, 뮌이 의도한 바와 달리, 감상자에게 자본주의의 역학을 뒤돌아보는 인식적 장보다는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명멸하는 가상현실이미지에 눈부셔하는 체험의 순간을 주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일정한 가치를 갖는 미디어아트다. 하지만 자신의 사고와 감각을 작품의 물리적 현존에 삼투하고자 하는 작가들만큼이나, 감상자 또한 작품의 표면 혹은 순간적 효과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구경꾼 역을 벗어나 감성과 판단력을 가진 능동적 경험자로서 작품과 관계하고 싶어 한다. 뮌의 이전 작품들의 가치에 한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감상자 주체의 욕구다. 그런데 이번 뮌의 전시에서 가령 나나 당신은 이미 써진 글 위에 새로운 글을 겹쳐 쓰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처럼, 다르면서도 엇비슷하고, 공약불가능하면서도 상호 매개되는 무엇을 개시하고 중층화할 수 있다. 거기서는 작가의 창작시간과 감상자의 향유시간이 물질을 매개로 겹쳐지고, 이미지기억의 작용공간과 심미적 주체의 피드백공간이 모터처럼 사소한 공학 장치에 힘입어서라도 확장된다. 뮌이 <기억극장>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감상자가 전시를 관통해서 그와 같은 개시, 중층화, 확장을 실행했다면 뮌의 미디어아트에 이질성이 도입된 것이다. 이질성은 16세기 분더캄머, 즉 경이의 방을 축성한 가장 중요한 비가시적 힘이었다. 뮌의 미디어아트가 감상자의 이질성을 물질 아래서, 장치 너머에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동일시라는 제한 바깥에서 적극화할 이유가 그와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