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
답이 없는 질문이 있다. “회화란 무엇인가?”
역시 그런 질문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답을 찾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는 것일지 모른다.
3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는 <그림/그림자_ 오늘의 회화전>도 그러한 부류의 질문에 다름 아니다. 국내외 작가 12명의 작품 35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된 전시다. ‘회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회화의 기원’으로 보는 역설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다수의 중심이 넘실대는 그림
이선영 미술비평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 자극적인 표현에 탐닉하는 이들은 ‘OO는 죽었다’는 식의 수사법을 자주 구사한다. 그렇게 선정적이고 요란하게 종언이 고해지는 대표적 항목으로 신, 인간, 역사, 모더니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회화 역시 이 대열의 단골메뉴에 끼어든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끝은 나지 않았고, 종언의 역사만 수백 년 이어가게 생겼다. 하기야 ‘내 그림이 마지막 그림일 것이다’라는 정도의 야심도 없이 작업을 한다는 것도 싱거운 일이다. 마지막을 생각한다는 것은 주목 끌기에 불과한 사이비 청산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명확한 답이 없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물음은 마치 ‘OO란 무엇인가’로 요약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질문—논리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답이 없는 우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계속 그리면서 또는 쓰면서 답을 찾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에 결정적인 대답이 있다면 회화는 정말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림이 제의나 종교로부터 자율화되던 순간부터, 사진이나 영화 같은 다른 경쟁적인 시각매체가 부상한 이후부터 회화의 종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각 분야의 자율성이 확립되던 시기에, 즉 이미지의 오랜 역사 중 결정적 국면에 해당되는 순수예술의 탄생 시기에 회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자의식적으로 묻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종언의 가능성 역시 떠올랐을 것이다. 회화의 종언은 근대에 탄생한 회화의 몸체에 속해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회화가 죽은 것 같지는 않다. 이전시대와 달리 이미지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수많은 복제매체가 편재하며, 장르 구별이 와해된 지금도 가장 많은 미술인이 하고 있으며, 대중이 미술에 대해 가지는 대표 이미지 역시 그림이다. 공정한 눈으로 돌아보면, 재능 있는 수많은 화가가 매진하고 있는 이 오랜 역사의 예술이 가지는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회화의 건재를 알리는 중간점검 식의 전시가 열리곤 한다.
플라토에서 열린 <그림/그림자전> 역시 왜 회화인가 자문하는 맥락이지만, 그림의 기원을 그림자로 보는 관점을 통해서 현대회화의 특징을 가늠해보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주류였던 창이나 거울로서의 비유를 넘어서, 비주류의 역사로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실물이 드리운 그림자의 윤곽선을 베낀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림자 그림은 실물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림과 실물을 동일시하는 것은 주술적인 사고이며, 이러한 경향은 종교분야에서 유서가 깊다. 저자들에 따르면 주술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림이 실물을 얼마나 닮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대에 이러한 신화를 처음 기록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그림자 그림이 떠나갈 애인을 기념하기 위해,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 구실을 했다고 전한다.
비주류 역사로서의 그림
같은 기원을 공유하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빅토르 스토이치타)도 거울과 대조되는 그림자의 속성을 강조한다. 타자에게 속해있으며 타자를 닮은 그림자 그림은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알린다.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 이상은 아니었다. 그림자로서의 그림은 원본/복제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유가 아니라, 차이와 반복의 유희에 의한 허상simulacres에 속한다. 모상이 아닌 허상으로서의 속성이, 그림자/그림의 신화와 현대회화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허상은 무한히 반복되는 사물들의 순환을 보여주며, 이 반복은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을 긍정한다고 말한다. 두뇌기관의 한 연장으로서의 시각이 체계적인 광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며 이상적인 원형idea의 재현으로 귀결된다면, 그림자 그림은 우연하고 다양한 것이 생성되는 바탕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래서 그림자 그림은 촉각적이다. 이러한 촉각적 시선에 눈이 있다면 뇌의 말단이 아니라 손의 끝에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연인을 기념하기 위해 탄생한 그림자 그림은 이성적인 시선의 냉정한 거리감이 아니라, 전신의 피부에 와 닿는 끈적끈적한 것이며 몸과 무의식에 호소한다. 한국을 포함해 영국, 미국, 중국,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물감의 물성과 붓질이 직접 드러나는 회화적painterly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세핀 할보슨의 화면은 공사장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널빤지 같은 거친 모양새로, 사물과 물감의 물성을 하나로 수렴한다. 케이티 모란의 작은 작품들은 예측 불가능한 기후적 현상과 폭풍같이 몰아치는 붓질을 하나로 만든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모호한 것들을 통해 재현의 투명성에서 그리기의 불투명성으로 이동한다. 어둡고 칙칙하며 두꺼운 화면을 보여주는 질리언 카네기는 무대의 커튼으로 시작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오마주하면서 재현주의를 끝장내려는 의도에 동참한다. 이곳과 저곳 사이를 구별하는 무대적 환영의 거리감은 질척거리는 회화의 대지로 재탄생했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보여주는 빌헬름 사스날의 작품에서는 반영된 세계가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역전이 일어난다. 회화는 사진을 포함한 다른 매체의 경험을 종합할 수 있으며, 그것이 현대회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순간 지나가는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박진아와 셰르반 사부, 보도사진에서 소재를 취한 리송송李松松의 작품에는 사진적 시각이 있다. 사진과 그림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지표index적 특성을 지적한다. 플리니우스는 그림자를 사람의 흔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 역시 도상적 유사물이자 지표로 여겨진다. 다수의 스냅샷을 한 화면에 결합시키는 박진아, 흐릿한 역사의 기억을 불러내는 셰르반 사부와 리송송의 작품에는 잠재적인 혹은 명시적인 다수의 틈이 있다. 직선적 전망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곳에서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 있는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균열과 간극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생성된다. 빛을 모범으로 하는 계몽적 의식의 세계와 달리, 그림자의 세계는 무의식적이다.
이 의식 하부의 불연속적인 세계에 출몰하는 인물들은 대개 낯선 타자들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백현진의 그림들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터치로 조증과 우울증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무의식적 흐름을 보여준다. 데이나 슈츠의 <싱어 송 라이터>는 입체파적으로 조각난 파편으로 활달한 인물을 구축한다. 브라이언 캘빈의 팝적인 초상화는 현실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으며 그리기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소수자 또한 타자의 형상을 취한다. 헤르난 바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흑인,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전형적인 초상화 구도에 흑인들을 집어넣은 리넷 이아돔-보아케의 작품엔 작가의 자의식이 투사된다. 그들의 작품은 주류 사회에 의해서 그림자로 취급받는 성적, 인종적 소수자나 아프리카계 영국 여성 작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정글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촉각적 우주 속 인물(동시에 ‘괴물’)들은 하나의 태양만이 빛나는 지배적 질서에 포착되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