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실록

Historical Imagination  The King Danjong Stories  by Suh Yongsun

28년간 단종과 관련한 비극적 역사를 소재로 작업한 서용선의 개인전 <역사적 상상-서용선의 단종실록>이 5월 2일부터 7월 27일까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에서 열린다. 서용선의 작업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 아닌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에 대해 사유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겸재정선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이석우 전 경희대 교수가 서용선 작가를 만났다. 이 대담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색다르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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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사학자, 단종의 비극을 말하다

이석우(이하 ‘이’)  반갑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서용선의 단종실록> 그 전시 제목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서 작가의 전시가 조선시대 역사를 다시 몰고 온 느낌이에요.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단종의 등극부터 영월에서의 죽음까지 과정을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종은 1441년에 태어나서 1457년에 17세로 생을 마감했죠. 아버지 문종의 병약함과 어머니 현덕왕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단종은 태생부터 비극적인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종은 12세이던 1452년부터 1455년까지 약 3년 동안 재위했어요. 그런데 왕으로 등극한 바로 다음 해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癸酉靖難)’을 일으킵니다. 이후 단종은 1455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1456년 6월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1457년 9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고 같은 해 9월, 금성대군(수양대군의 이복형제)이 단종을 복위하려 역모를 일으켰지만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요. 이를 빌미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평민으로 또 강봉되고, 10월에 죽임을 당합니다. 정순왕후도 평민이 되었고 82년 한 많은 세월을 살았지요, 단종은 영월에 5개월 동안만 머물렀는데도 수백 년의 역사를 넘은 오늘에 새로운 역사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니 역사의 회복력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00여 년 후, 1511년(중종 11년) 묘역이 정해지고 간간이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중종은 스스로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지라 단종에 대해 애절한 연민의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해요. 이어 1681년(숙종 7년) 신원을 시켜 노산군으로 추봉하고 1689년(숙종 15년)에 왕으로 복위해 단종으로 칭하고 묘역을 장릉으로 꾸몄죠. 저는 이번 서 작가의 전시를 보면서 우리의 미래 과제를 오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역사의 경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문제가 복잡할수록 역사를 통해, 우리의 전통을 통해 창조적으로 그 해답을 구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제 전시로 돌아와 질문을 드려보죠. 서 작가에게 역사란 무엇입니까? 지난 30여 년간 이 소재를 끈질기게 천착하며 탐구해 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 갈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서용선(이하 ‘서’)  저는 역사의 일부를 소재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역사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단종과 그 외 6·25전쟁 등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작업하고 있어요. 제 작업의 주 관심분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특히 단종에 대해서는 그것 자체로 역사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처음부터 ‘역사’라는 넓은 영역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작업이 쌓이다보니 역사를 주제로 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일부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미술을 시작하고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를 배우면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졌습니다. 서구 역사를 보면서 서구 미술의 주제의식과 형식이 왜 다른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조선시대 미술을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구와 비견할 만한 역사가 있을텐데 왜 그것이 그려지지 않았나 하면서, 그것을 주제로 한 작품에 욕심을 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영월을 다녀오게 된 겁니다. 그 현장, 영월을 보기 전부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이지요. 그런데 더 길게 생각하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더 주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회와 관계를 이루는 것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내 초기 그림을 보면 그냥 인물이 혼자 서있는, 도시사람을 그리거나 했죠. 내용을 전달하는 데 한계를 느낀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들이 모여 역사적 내용의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을 세우고 초기 국가로서의 면모를 띄어가는 과정이 이후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 거쳐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던 과정과 비교해 볼 때 그 흐름이 매우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 몇 가지 내용을 갖고 작품을 그려나갔고 시간이 흐르게 된 거죠.
이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의 인간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사는 것도 인간이지만 또한 역사를 만든다”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요. 역사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역사란 그것 자체가 기록이 되어야 이뤄집니다. 그 기록의 행위는 쓰거나 그리거나 하는 것들이겠지요. 역사에 그것을 기록하거나 그리는 사람의 바람과 한과 원망이 투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진실과 화가적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역사적 기록이 사실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어요. 특히 단종에 대한 기록이 그렇더군요. 바로 이러한 의심이 제가 작업을 하는 이유입니다. 사실 역사를 소재로 작업하면서 역사와 그림이 별개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한 결론과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기록하는 대개의 경우인 문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을 검증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단종과 관련된 역사는 제가 보기엔 매우 의도적인 허구라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가 나이가 꽤 들어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갖고 시작했는지, 어떻게 하다보니 이런 전공을 갖게 된 작가로서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명쾌한 해답을 갖지 못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문자와 그림 중 어떤 것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확신도 없어요. 저는 어떻게 보면 의혹이 더 깊어지는 상황에 있지 않나 합니다.
이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한계와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본인의 생각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의 집권과정이 세조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서 작가가 의혹을 갖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는 계유정난은 일종의 권력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단순히 세조 개인의 야심인가? 아니면 조선시대를 관통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양상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름에 따라 왕권은 김종서 등 재상들에게 거의 위임되어 약화됐음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서 작가의 작업을 보면 당시 사건을 윤리적 측면으로만 조명하여 단종에 대한 애련의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조도 역사적으로 보면 공(功)이 없다고 볼 수 없지요.
  기본적으로 세조라는 한 인간이 가진 권력지향성, 투쟁성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맞춰 주변에 다른 세력이 합쳐지게 됐지요. 안평대군과 세조를 비교해 봅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보면 비판거리가 생기며 긍정할 것과 부정할 것이 생기지요. 저는 일반적인 인간의 성향으로 봐서 자신의 형제를 처단하지 않고 국가를 끌어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겠지요. 현실과 역사의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세조 같은 사람이 탄생했는가? 이전 시대 역사의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저는 그래도 윤리적 측면에서 좀 더 좋은 왕권이 발휘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듣고 보니 좋은 말씀이에요. 작품으로 돌아가 보지요. 작품 내용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등장하는 인물이 형태는 매우 모호하지만 흡입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  이 얘기는 이 전시를 기획한 이윤희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큐레이터와 주제에 대해 수없이 논의했으니까요.
이윤희  작가는 역사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작업을 진행한 바, 저는 특히 단종과 관련한 작업을 집중해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제안에 작가가 흔쾌히 응했죠. 흡입력을 이야기하셨는데 관람객의 입장에서 여러 요인에 의해 그것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과감한 원색의 사용이랄지, 장엄한 스케일의 지향, 서로 만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화폭의 운용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포함하여 작업을 바라보게 만드는 주요한 이유는 방금 말씀하셨듯이 모호한 인물의 표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호하지만 그들의 표정도 매우 모호합니다.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관람객이 문정왕후나 김시습의 입장이 되어 감정을 투사하게 됩니다. 그럴 여지를 열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결말이 내려지지 않지요. 서구에서 역사화는 특정한 메시지, 관점이 전달되어 결말을 지정해두고 있지만, 서 작가의 작업은 그렇지 않아요. 따라서 관객은 상상력을 발휘해 작품을 대하게 됩니다.
  형태가 모호한 이유는 그 인물을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웃음) 그러나 그것과 함께 사람을 그리는 데 있어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제 작품뿐만 아니라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하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겠지요. 인류에게 역사는 동적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그려지는 순간, 정지되죠. 무척 고전적인 생각인데 이러한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의 해답을 구하지 못했지요. 이는 재현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 회화는 좀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고 봅니다. 회화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에 희망을 갖는 이유는 예술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제가 현대미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속에서 동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화에서 표현이 신중하지 않으면 현실과 차이가 나는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추상미술에서 그러한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우리의 감정을 그것에 동조하게 만듭니다. 그저 닮음을 목적으로 하거나 인물을 그리는 등 재현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업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죠. 저는 작품을 제작하는 이가 갖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 다른 매체로 환원시키거나 치환하고, 그리고 감정을 전달할 것이냐에 집중합니다. 제 작업에 흡입력이 있다면, 아마 거기에서 비롯한 것이겠죠.
비극, 자기 정화의 계기가 되다
  앞서의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서 작가의 화폭에서는 짙은 비극성, 비애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 감정이입의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서  200여 명의 사람이 희생된 사건의 그림이라서 더 그럴 것입니다. 그것 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그렸을 때 굳이 즐거운 표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물어보신 질문의 답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매번 어둡거나 슬픈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자신은 밝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내가 살아온 삶이 전쟁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않은 전후(戰後)시대를 지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예술의 형식에서 비극적 내용을 담았지만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었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겪은 일에 위로를 주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 아닌가 합니다.
  단종이 겪은 형태의 비극을 모양과 시기만 다르지 현실적으로 아픈 삶을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살아남은 것도 이들 한을 잘 승화시키는 능력과 저력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서 서 작가의 작품이 단종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많은 이에게 힘을 낼 수 있는 자기정화의 계기가 되는 이유가 전환의 발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이 시대를 사는 작가의 쟁점이 되는데 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서 작가는 역사적 산수화란 말을 쓰고 있어요. 풍경화, 역사적 풍경화, 또는 진경산수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제가 보기에 정치와 예술이 겹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도 그것이(예술과 정치의 관계가) 반드시 어떤 원리에 따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분리되어야 한다거나 기본적으로 언어 자체가 다르니까 기능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때는 예술이 정치적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정치가 예술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제가 풍경화, 진경산수화, 산수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지 10년도 채 안된 것 같습니다. 특히 단종과 관련된 이런 역사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최근에, 이번에 글을 쓰신 조인수 선생님께서 지난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그런 유적지에 대해 언급하셔서 제가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산수화라든지 풍경화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인물화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풍경화라는 용어도 우리가 옛날에 쓰지 않던 것이죠. 일본사람들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동양에 유입된, ‘landscape’를 일러 서양의 용어와는 다른 말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서양의 ‘landscape’와 ‘풍경’은 직역을 해도 의미가 좀 다른 거죠. ‘경치’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풍경화’라 하면 약간 낭만적인 느낌도 들어갑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일본인들이 서양의 전형적인 ‘landscape’를 자기네 식으로 옮기면서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진경산수화는 가치를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어서 사실 어느 것이나 다 진경이죠. 진경. 또한 우리의 땅만 진경이라고 할 수는 없죠, 사실 진경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과의 관계에서 중화사상과 연관된, 조선시대에 그런 사고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써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넓게 봐서 산수화나 진경산수화 같은 장르적 개념은 인간이 시대적 상황, 어떤 정치적 상황에 처했을 때 더 다가오지 않던가요? 예를 들자면, 진경산수나 조선시대 산수화를 보면 사대부들이 정치적으로 거리를 둘 때 자연을 더 깊이 있게 보게 되고, 자연에 더 애정도 가는 것처럼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굉장히 유동적으로 흘러가지요. 또한 현대에 와서 서양에서는 정치와 예술은 따로 떨어져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까? 이런 순수목적의 예술을 향하는 것이 한국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중국 송대의 미술이 서구보다 훨씬 더 발전해 있었을 때, 그 미술이 정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제 생각으로는 한국에서는 정치와 예술에 관한 논의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고, 그런 점에 대해서 얘기가 된 것은 이제 뭐 1970, 80년대 문학, 미술 쪽에서 현실문제가 좀 노골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너무 짧아 깊이 있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게 훈련이 잘 안 되어있어요.
  괴테는 “감정의 반향 없는 객관적인 색채란 없다”고 했습니다. 서 작가의 작품에서 색채가 갖는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저도 처음에는 원색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야 의식적으로 원색을 쓰게 됐지요. 학부 시절 단순히 ‘그림 그린다’는 생각만 했는데 대학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어요. 그때 굉장히 당황했는데 결국 서양화를 선택했지요. 제도를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당시 제가 시류에 쏠려 선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의 시기를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가졌어요. 그래서 어떤 동양화, 산수화를 보면 좋은 그림 같긴 한데 서양화를 선택했기 때문에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으로 관심을 가지다보니까 서양화는 색채가 활발하게 사용되고 동양화는 수묵을 사용하는 현격한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제가 동양화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그랬을 겁니다. 동양에도 수묵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색채를 화려하게 사용한 불교미술, 원시미술, 동굴미술도 있지요. 저는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우선 동양화라하면 수묵화만 생각했어요. 고려시대에 불화도 있었는데 말이죠. 이러한 반성의 소리도 일부 비평가들이 언급했어요. 그때 저도 동의했고, 근본적으로 왜 서양 사람들은 현대회화에서 색채를 다양하게 쓰는데 우리는 왜 거기에 소극적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색채를 사용하게 되었죠. 사실 저 자신도 색 쓰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는데 색채를 잘 쓰는 것보다, 일단 저의 색채에 대한 생각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원근법, 공기원근법에서 색을 섞어서 부드러운 색을 만들어 공간감을 재현하는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내가 가진 생각을 파괴하기 위해 원색을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이것을 반성해요. 어떤 때는 무채색을 가지고 정신의 깊은 면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해서 한 번씩 시도는 해보는데 왠지 마음에 안들어 다시 원색을 쓰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것을 조금씩 더 도입해보고 싶어요.
  당시 안평대군은 정치, 예술, 문화 영역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안평대군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또 기린교를 안평대군의 집터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안평대군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제가 단종과 연관된 그림을 그리면서, 조선 초기 중요한 그림 중 하나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린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지요. 그런데 그것과 연관된 안견과 안평대군에 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하더군요. 그런 자료를 찾는 방법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안평대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세조에 의해서 철저하게 지워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안견의 생애도 세조와 안평대군의 관계로 봤을 때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2년 전 외교관을 지내신 김경임이라는 분이《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라는 책을 내신 것을 매체를 통해 접하고 그 책을 읽게 됐지요. 읽어보니 제가 궁금해 하던 부분들을 그분이 찾아서 추적하셨더라고요. 그 책에 기술된 내용이 모두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단종과 연관되어 가장 흥미롭게 본 내용이기도 합니다.
  단종은 운명을 넘어 신화화되었다고 합니다. 단종의 행적이 신화화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서  방금 제가 한 말과 좀 모순되지만 사람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대상으로서의 사람은 희극적인 요소를 가졌다고 보기에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어떤 면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살면서 본능적으로 다른 이에게 공감하기도 하고. 그게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단종이 신화화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왕이었다가 비참하게 죽음으로 가지요. 그 과정이 독특한 하나의 사건 모델로서 기억되거든요. 영월과 그 일대에 있는 단종의 흔적을 보면 사당과 산신각, 위패를 모신 허술한 슬레이트 구조물 등이 있어요. 또한 산신령으로서 단종이 모셔진 곳도 있지요. 또 답사를 가서 보니 음력 정월 초하루에 마을 사람들이 단종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더군요. 그분들에 따르면 예전에 새마을운동을 하던 시절 정부의 철거 지시도 거부하고 그것을 지켰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분들이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다 간 단종의 삶에 의탁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을 문학작품, 혹은 그림으로 남기거나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존재가치가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에 대한 각각의 평가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세조를 비롯해, 김시습, 김종서, 현실적이기도 했던 신숙주, 애잔한 삶을 살다간 정순왕후 등 말이에요.
신화화 되는 단종
  깁시습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하나이지요. 게다가 뛰어난 문장가이며, 특히 지식을 실천한 결단력이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유교, 불교, 선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시인으로서, 문장가로서, 또한 문인으로서 파악해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세조도 결단력에는, 약간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혁명이란 인간이 동물적 감각으로 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권력에 휘둘렸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단종을 죽였지만 안평에 대한 질투심과 맞물린 감도 없지 않은데다 사안을 좀 회유하려 했던 의도도 보이거든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선의 없는 용기가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를 내다보는 혜안은 갖지 못한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또 김종서는 일반에게는 무인적 기질이 다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뛰어난 문인이기도 하죠. 역시 시대 흐름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신숙주는 제가 말하기 가장 망설여지는데 정말 재능도 많고 그에 비례해 높은 지식을 쌓았지만 좋은 의지를 가지진 못한 것 같아요. 의롭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현실에서 이런 형의 인간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죠. 마지막으로 정순왕후는 기록이 일천해서 뭐라 하긴 그렇지만 성품이 진중해서 굉장히 신중하게 처신했다고 보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매우 호의적이예요.
  우리는 왕왕 현실에 매몰되어 역사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서 작가의 역사화는 관람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여러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저는 한국에 역사화가 무척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미술에서 역사화는 주류가 아니지만 한국이 가진 역사는 이미지로 표현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주제로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창조적 생각일 수가 있어요. 조선시대에 권력의 지각변동을 가져온 사건이 왜 이미지로 나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그렇게 보면 6·25전쟁에 대한 그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처절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다음을 묻죠. 한국미의 본원, 본질은 어디에 있다고 보며, 그런 미감이 이번 단종실록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런 내용을 정리한 적은 없지만 이런 느낌은 있습니다. 외국에 갔다가 돌아와 제가 사는 양평 산골을 걸으면, 땅, 하늘, 주변 환경, 자연이 내 몸을 당기는 것 같은 느낌, 어떤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자연에 관심을 갖다보면 당연히 자연은 우리 몸속에서 느껴지고 그것이 작업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특징으로 생각한다면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기자기하고 변화가 많은 것이 우리지형이고 금수강산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고 느끼고 있어요. 더 나아가 자연 환경에 과거로부터 압축되어온 인간, 우리들의 생각이 종교적인, 특히 불교 쪽에서 갖고 있는 인자함이나 자애정신이 예전에는 소극적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주의적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는데, 이제 그런 부분을 극복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그림 속에서 그런 생각이 배어나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참 절실한 내면의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서 작가의 그림이 세계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윤희 큐레이터에게 여쭙고 싶은 내용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요?(웃음) 최근 한 10년 사이에 외국에서 전시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올바르게 주어진 기회들은 아니었어요. 저는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았고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전시를 열었지만, 서구나 다른 나라에서 금방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람들이 와서 보지도 않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전시를 하였지만 특히 이런 역사 소재 그림은 한두 번 보고 느낌이 와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외국인이 이해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전에 기초적인 소통이 없이 그림만 봤을 땐 추상적인 느낌을 받지만 서술적인 면에서는 전달이 잘 되지 않고 스토리를 얘기하면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는 점에서, 아 이건 힘들다 생각했습니다.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간 매체를 개발하지 못했다는 점도 걸리고요. 외국인에게 스토리를 이야기했을 때, 자기네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환기해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감각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전달방법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갤러리에서도, 저도 많은 글을 써놓았더니 그 글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사람도 많이 있고 또 공감했거든요.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그러한 방법을 시도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한두 번의 번역과 또 그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중간에서 어떤 방법을 개발해서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결과에 큰 차이가 나거든요. 그림을 보는 사람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 한도에서 보려고 할 때, 그 접합점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숙제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지만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힘든 점이 있다는 것.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단종 문제에서는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고, 자칫 제가 속한 지역에 대한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단종의 복권을 보면서 역사의 정의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에 이르면 되는 것일까요?
  정의라는 형태가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요. 특히 복권은 당사자가 죽어 없어졌기에 현실적으로 다시 돌이킬 수는 없지만, 인간의 본질 속에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지혜가 있다고 봅니다. 단종의 복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갖춰지지만 사실 죽은 직후부터 그러한 운동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사육신조차 그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1, 2년 후에 세조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고려할 때 정의구현의 힘 같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거대한 역사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어요. 시공간을 넘나들고 문학과 역사와 미술을 아우르며, 우리의 영감과 의식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작품 제작에 대한 작가 기록에서도 문장력이 힘차고 감성과 현장감이 넘칩니다. 이번 대담에서도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을 잘 정리해 주시어, 얘기 자체가 매우 즐거웠습니다. 다시 한 번 전시 축하드립니다.
정리・황석권 수석기자, 김선영 객원기자

(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81.5×227cm 2014 (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송씨 부인>(사진 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181.5×227cm 2014 <왕과 신하들>(사진 맨 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5cm 2014

 

 캔버스에 아크릴 300×500cm 2014

<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 캔버스에 아크릴 300×500cm 2014

 

서용선(왼쪽)은 서울대 회화과와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9)에 선정됐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양평에서 작업하고 있다.

이석우 겸재정선기념관 관장은 경희대 사학과 교수, 대학 사학회장을 역임하고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 하》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