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박미경-역사 없는 밤의 세계
박미경 __ 역사 없는 밤의 세계
송은아트큐브 4.11-5.28
언뜻 보면, 태곳적 자연의 모습인 듯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웅장한 규모와 깊이, 중량감을 가진, 인간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언어와 야생의 규칙만으로 구성된 풍경. 그것이 박미경의 그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표면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현실의 시간, 현실의 공간을 채록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에서 연동하여 자동기술처럼 토사하고 쌓아올린 형상들로,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풍경처럼 보이나 풍경이 아닌 그림인 것이다.
이처럼 기억의 재구성과 변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의 그리기는 독특한 공정(?)이 요구된다. 우선 그에게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빈 캔버스 위에 점이나 선과 같은 단편적인 조형 요소들이 단서가 되어 작가의 기억 속 편린들을 자극하고 그 감정의 부추김에 의해 다음 단계의 전개 방향이 무의식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작가의 의식으로부터 호출된 낱낱의 기억들, 무의식으로부터 연원된 무수한 우연과 예측불허의 상황들이 돌발적으로 교차하고 상충하는 자가증식의 과정을 거쳐 낯선 풍경과 같이 전혀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무의식과 꿈에서 자신들의 리얼리티를 찾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과 어느 정도 유사해 보이기도 하나 박미경의 경우, 현실의 의식적 상황들을 부정하는 방편으로서의 ‘설정’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과 기억을 의식하면서 초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는 중간 과정의 ‘소임’이라는 점에서 그와는 다른 지점의 수행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미경의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표현적 특징은 거대 서사적인 화면 장악력과 캔버스의 배후로까지 넘어갈 듯한 디테일의 깊이라는 상극적인 감성 표현이 탁월하게 조우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특히 최근작은 이전에 비해 풍경적 표현의 스케일이 장대하게 발전했는데, 그 까마득한 거리감으로 인해 심리적 공간이라는 정황마저 망각한 채 시각적 경외심에 설득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확장은 그의 기억과 심리에 근거한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영역을 넓혀 발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무채색을 선호한 것이 한없이 가라앉는 어둡고 묵직한 심리의 표정인지, 나이프의 경직되고 날선 단선의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는 기억 속 상처와 예민한 정서를 들춘 것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려는 단호한 의지의 선언인지는 여기서 부차시된다. 박미경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기라는 행위 자체와 캔버스 위에 새롭게 나타난 과거 속 수많은 박미경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끄집어내고 다시 곧추 세우며 나아가려는 그의 심리 풍경은 기억의 씻김과 의식의 안식을 위한 본능적 행위처럼 다가온다. 그의 예술적 진중함과 진득함은 당분간 이 지점에서 발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정주・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