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장재민,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

Project Space 사루비아 다방 5.2-31

그리기의 대상.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작가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그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확정적이고 단선적인 풍경 대신에 그의 화면 위에 올라와 있는 풍경은 어쩌면 대상이라기보다 잡을 수 없는 상태이자 기온처럼 보인다. 변화무쌍한 어제와 오늘의 날씨, 더웠다가 추워지는 체온계의 높낮이처럼 그림 안에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한다고, ‘감각’에 의존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장재민이 담아낸 풍경은 확정적 단서가 아닌 쌓인 밤과 낮의 시간, 물 옆의 연기와 숲속 공터 그리고 그 시간들 속으로 사라졌다가 조금씩 몸을 일으켜세우는 여백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채워지는 풍경 사이로 각각의 장면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얽히고설킨 한때를 보여준다. 작가가 잡아낸 한때의 장면을 그는(그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는) 왜 ‘시간을 잃어버린 풍경’이라 이름붙였을까. 잃어버렸기 때문에 폐허에서 솟아나는 선분홍색의 작은 살덩어리처럼, 그림 속을 가로지르는 붓질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찾고자 한다.
찾기, 그리고 걷고 보며 탐색하는 일은 작가로 하여금 새로운 그림, 그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른 풍경을 발굴하는 일을 지속하게 한다. 장재민의 그림은 풍경을 불확정적인 미지의 단서들로 둘러싸인 새로운 자리로 불러온다.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대상들을 멀리 또 가까이 보는 굴절된 조감의 시간을 통해 그림 속의 단서들은 하나씩 돌출해 바깥으로 걸어나온다.
초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에 찾은 전시장은 어쩐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전시장에 걸린 몇 점의 캔버스는 벽면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 툭툭 몇 장면을 축약해 잘라낸 듯 평평하게 걸린 화이트 큐브의 그림들과는 다르다. 전시장에 따로 또 같이 있는 몇 점의 그림은 캔버스의 사각 프레임 안에 갇히지 않고 한 바퀴 둘러본 듯한 사방의 풍경이 되어 바깥의 현실과 겹친다. <Reaction for Nothing>, 가로 468cm에 달하는 긴 그림이 펼쳐져 있다. 어떤 그림은 벽의 모서리를 꼭지점으로 두고 사선으로 걸려있기에 벽에서 살짝 앞으로 튕겨져 나와 벽의 시간과 일정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Blank Sight>가 걸려있는 방식은 중력을 가진 그림의 무게와 지탱하는 벽이 팽팽하게 서로의 긴장 관계를 대칭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산 아래의 이름 모를 장소는 작가가 잡아내고자 하는 ‘비어있음’의 역설로서, 풍성한 상태를 드러낸다. 장소의 구체성은 사라진 대신 그때 존재했던 찰나의 땅, 산, 공기의 감각들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생경하게 더듬는다. 그런가 하면 <Cold Breath>에서 차가운 살얼음 수평 면 위에 수직으로 뻗은 가는 나뭇가지들은 가려진 시야를 복원시키는 날 선 한때의 기록이 되려 한다.
평소와 다른 몸의 감각을 불현듯 체현하는 것. 장재민의 그림에 공존하는 뜨거움과 차가움은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하나의 관통하는 시야 안에서 바라보게 한다. 회색 톤의 정조가 감도는 그림에는 몇 겹의 생채기, 그러니까 붓이 만들어낸 리듬의 흔적이 보일 듯 말 듯 약간의 경쾌함을 남긴다. 작품 <Line and Smoke>의 장면은 미끄러지면서 사라지는 연기의 찰나를 그림으로써 잡아낸다. 전시장에 있는 그림 중 가장 따뜻한 체온이 감도는 그림 <4 Boards>에는 유일하게 사람이 보인다. 발에서부터 허리까지, 하체만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다. 관람객은 얼굴없는 이 사람의 시야를 유추하며 계단 위 공간에 놓인 이 그림을 올려다보게 된다. 사라져 가는 모든 풍경은 장재민의 그림 안에서 유일한 시간을 획득한다.

현시원・독립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