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김기수 – 대단지 입구
김기수 – 대단지 입구
아트스페이스 풀 8.1~9.6
김기수의 근작 회화들은 어떤 과거의 이미지를 내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가 그린 낡은 건물, 황량한 길을 내달리는 버스, 탁자 위에 놓인 주스, 참외, 기념사진 같은 이미지들은 내 기억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킨다. 나는 그런 이미지들과 더불어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대부분 유쾌하지 않다. 그 버스는 내게 고된 일과를 마치고 땀에 젖은 몸을 이끌고 부대로 귀환하던 20대 초반의 고단한 하루를 상기시키고 그 노르스름한 주스는 공부해야 하는 아들을 붙잡고 놀고 있는 아들 친구에게 어떤 어머니가 선사한 최소한의 성의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는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 복고적 향수 따위가 들어설 틈이 없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몰입할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근작 회화들의 전시에 그는 ‘대단지 입구’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그 ‘대단지’는 지금의 서울시(수도권) 형성 과정에서 벌어졌던 어떤 사건 또는 아픈 상처-광주 대단지 사건-와 연관된 것이다. 강홍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전시는 “성남-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원주민의 후손이 가질 법한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있는 낡은 사진같은 빛바랜, 흐릿한, 푸르스름하고 노르스름한 이미지들은 사라졌다고 믿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득달같이 나를 덮쳐오는 아픈 상처에 관계된 것이다. 다시 강홍구를 인용하면 지금 김기수의 정체성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받은 자의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미지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 사라졌다고 믿지만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유령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김기수의 근작들은 봉합된 상처들을 헤집고 “잊지 말자 대단지”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의 근작들에서 대단지는 과거에 비해서(그는 과거에 사진과 영상, 설치 등으로 대단지를 다룬 적이 있다) 상당히 추상화되었다. 불분명한 문맥 속에 흐릿하게 제시된 이미지들은 롤랑 바르트식으로 말하면 “나를 꿰뚫기 위해 오는” 화살 끝을 무디게 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매체로 택한 회화의 특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회화는 순간에 관여하는 사진과 달리 시간(의 흐름)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순차적으로 가해진 붓질은 생생한 사물 또는 대상의 완벽한 유사물-사진과의 마주침이 가했던 충격을 완화시킨다. 게다가 회화의 이미지는 속성상 ‘코드 없는 메시지’인 사진과는 달리 코드가 부여된 이미지-환영이다. 그렇게 본다면 김기수의 근작 회화들은 환영을 통해 유령을 소환하는 작업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 주로 사진과 더불어 작업했던 김기수가 지금 회화로 ‘돌아선’ 이유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외상적 기억을 활성화하거나, 충격을 주기보다는-회화로써- 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숙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숙고에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매개적인) 회화가 좀 더 어울릴 것이다. 물론 그러한 숙고는 외상을 장악할 수 없다. 김기수 자신은 이러한 작업을 ‘자각몽(lucid dreaming)’으로 비유한다. 자각몽 속에서는 깨어있는 자아가 꿈꾸는 자아를 바라본다. 여기서 두 자아는 서로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 이것은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외상과 더불어 사는 삶의 한 모델일 수 있다.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들에 붙인 ‘스텔스’라는 표제는 또 어떤가. 스텔스는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기술이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어떤 비행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외상과 부대끼며 사는 회화-삶에 그런대로 어울리는 표제가 아닌가.
홍지석・단국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