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백순실 – 보이는 소리, 들리는 색
백순실 __ 보이는 소리, 들리는 색
금산갤러리 5.28~6.20
같은 땅에서 한 해 두 번 농사짓는 일이 ‘그루갈이’다. 백순실의 작업을 떠올리면 그루갈이가 생각난다. 그가 캔버스로 도모하는 일을 경작에 견주어 보자. 가을 벼를 거두면 밀과 보리를 심고, 서둘러 푸성귀를 장만하거나 가욋일로 찻잎을 건사하고 꽃모종을 옮길 때까지, 백순실의 손놀림은 쉴 새 없이 재바르다. 심고 기르고 거두는, 그 지루한 노동이 일상화됐다. 그의 근면은 캔버스에 심은 실팍한 정성과 짝을 이루는데, 작가의 이름조차 ‘순직하고 참되다’는 뜻인 ‘순실(純實)’이다. 그의 성심은 지인들이 두루 인정하는 바여서 명실상부한 됨됨이가 작품에서 애쓴 흔적이 묻어나는 모양새와 여무지면서도 맵시로운 짜임새로 기어코 나타났을 테다.
하늘이나 땅에 대한 작가의 체화된 미더움은 이번 전시작에서도 한결같다. 머금은 침묵과 떠도는 지향, 또는 갈앉힘과 솟구침의 이미지가 공존하는 작품들의 표정에서 감이 잡힌다. 미술의 해묵은 소재로 하늘과 땅, 자연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작가가 그 뻔하디뻔한 상투성의 병통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데는 까닭이 있다. 선현의 가르침에 나오듯, 하늘과 땅은 비록 해묵었다 해도 끊임없이 새것을 낳고 나날이 새것을 기르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된 것이 가지는 겉치레에 물들지 않고, 새로운 것이 빠지는 허황됨에 혹하지 않는 것이 창작자의 숙원인바, 여느 작가처럼 백순실도 그쯤은 알고 있다. 그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의 함의를 따진다. 하늘과 땅은 변치 않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만든다. 그의 화면에서도 느껴진다. 낯익은 것이 낯설고, 늘 보이던 것이 새로 보인다. 굳건한 작가의 항심(恒心)은 거기서 찾아야 한다.
음악에 부치는 백순실의 순정은 도탑다. 출품작들은 아스라이 사라진 선율을 붙든다. 화포에 깃든 선율이 꿈을 꾸고, 씨를 뿌리며, 꽃을 피운다. 그의 화포는 당연히 ‘연주되지 않은 악보’를 넘어선다. 그가 그린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보자. 아늑한 평화 그리고 요동 뒤에 오는 관조와 명상은 이 교향곡의 밑가락이 된다. 작가는 특유의 장기인 구성적 긴장미를 부러 외면하면서 들뜨리만큼 쾌활한 붉은 색조와 깊숙한 녹음의 포치를 선보이는데, 이것이 소리마디를 내키는 대로 조율하는 발랄함으로 ‘전원’의 지평을 낭만적으로 바꾸는 구실을 한다. 이와 다른 게 말러의 교향곡 1번을 그린 작품이다. 통제된 아름다움이 앞장선다. 이 작품은 말러리안들이 흔히 말하는 ‘치유로서의 말러’를 설핏 떠오르게 한다. 하늘은 연분홍빛, 수많은 공기방울이 흔들리며 반짝인다. 땅은 어두운 갈색, 허투루 쌓은 구조 아래 꿰맨 자국이 선연한 바닥이 보인다. 꿰맨 곳과 쌓은 곳, 그 사이에 노란색의 가느다란 가로대가 자리 잡았다. 붉고 푸른 색실이 그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그것은 캄캄한 땅속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인가. 말러 음악은 ‘압력솥처럼 짓누르는 현대사회에서 개성을 회복하려는 자의 안간힘’을 북돋운다고 흔히 말들 하는데, 백순실의 화면에 내재한 극복의 전조는 견인주의(堅忍主義)의 경건성에 가깝다.
백순실은 온갖 재료를 품는다. 화산석이나 커피, 매트 미디엄과 석고까지 동원해 바탕이 바탕답게, 땅의 켜가 결이 되도록, 버무리고 주무른다. 체취가 바탕에 스미어 그림이 뼈와 살이 되는 느낌을 기원하는 것일까. 음악을 빚어도 전기적 펄스나 음향적 비트에 기대지 않고 날숨과 들숨, 걸음나비의 생체적 리듬을 실을 줄 아는 백순실은 드디어 말한다. “바보야, 문제는 농사가 아니라 그림이야.”
손철주・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