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정재호 – 먼지의 날들
정재호 __ 먼지의 날들
갤러리 현대 5.30~6.22
최근 새롭게 행동주의미술이 주목받으며 미술가들이 사회, 정치, 경제분야를 두고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행동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 매체를 사용하는 미술은 낡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우리는 세계 미술사에 남을 ‘민중미술’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 의의와 영향력은 여전히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겪은 ‘단절’ 이래 사회·역사적 이슈를 담은 작업은 일면 진부한 듯 여겨져 그 내용은 뒤로 밀리고 작가의 이름이 작업을 덮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재호의 회화 업은 행동주의미술과 민중미술적 태도와 닿아 있다. 허물어져버린 오래된 아파트와 건물들의 정면을 몸으로 기억하려는 듯 세밀하게 묘사한 일련의 작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사물의 현재를 기록하는 안간힘을 보여줬다. 커다란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건물 창은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고, 그 창을 사용했던 개개인들의 삶을 환기하게 만든다. 결국 오래된 건물을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은 오랜 시간 그곳을 장소로서 사용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정재호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온전히 체화하며 구체적 실존을 화면에 옮기는 시도인 것이다.
이렇듯 건물 파사드를 다룬 인상적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가 ‘먼지의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사물과 인물, 상황 등을 그린 작업을 전시했다. 그가 그린 것들은 불이 붙은 채 덩그러니 놓인 타자기, 무채색의 카메라, 종점에 모인 전차들, 공항으로 쓰였던 황량한 들판에 놓인 프로펠러 비행기, 오래된 텔레비전, 그레이하운드 버스, 우주선과 외계 행성에서 헬멧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소변을 보는 듯한 남자들, 영화 포스터에 나올 법한 여인의 초상,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인천 선인체육관 등 대부분 1960~1970년대의 흔적을 담은 것들이다. 화재로 연기가 오르는 홀리데이호텔 이미지와 버려진 차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 내 풀이 무성한 공터에 놓인 미끄럼틀과 시소 등은 모두 빛바랜 과거의 이미지다. 전시 서문을 쓴 정현은 “정재호에게 과거의 호출은 추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워지거나 잊혀진 기억의 잔해들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재현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과거 개발 시대 선진적 삶의 상징이었던 대상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정재호는 그리기라는 신체적, 물리적 활동을 매개로 대상을 기억하고 다시금 제시한다. 다시 말해 과거 대상에 대한 ‘그리기’는 ‘기억하기’라는 행동과 다름 없으며, 스스로 기억한 대상을 회화의 형식을 통해 재제시(re-presentation)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가 겨우 붓끝으로 잡아놓은 빛바랜 이미지들의 마법에 기꺼이 빠져든다. 바스러질 듯한 무채색 화면으로 섬광 같은 공감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정재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를 담지한 과거의 사물 이미지는 전시장을 나선 후 위력을 발휘한다. 마주치는 도심의 마천루와 거리는 주술에 걸린 듯 지상으로부터 몇 미터 떠 있는 듯하다. 선인체육관이 ‘먼지처럼’ 사라졌듯 우리를 둘러싼 단단한 현재와 사물들도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 이것이 미래를 주장하는 장밋빛 수사들의 속임수와 ‘현실’을 둘러싼 장막이 폭로되는 순간이라면 이토록 견결한 행동주의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서준호・스페이스 오뉴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