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조덕현 – THE GARDEN OF SOUNDS
아트클럽1563   3.7 – 5.17

조덕현의 <음(音)의 정원전>은 설치 형식으로 구현된 섬세한 벽화이자 음악을 위한 간이 무대이다. 음영과 음이 어우러진 공간은 실내에 조성된 정원이기도 하다. 13×4m 크기의 무대 안쪽 4.5m 너비 안에 놓여있는 갖가지 식물들은 밀폐된 하얀 무대 막 위에 다양한 실루엣을 드리운다. 하얀 막 위에 떨궈진 그림자는 마치 수묵화 같은 농담을 펼친다. 정적인 가운데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이 평화로운 풍경은 도시인의 눈을 어지럽히는 전광판 같은 형식이라는 점도 잊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수묵화뿐 아니라, 한옥의 하얀 문풍지에 비친 그림자, 그림자 연극, 수묵 애니메이션, 상감된 무늬, 압화, 흑백 사진–작품 <그림자들>(1986)의 작가 볼탕스키는 ‘그리스에서 그림자라는 말에는 빛을 가지고 적는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림자는 최초의 사진이다’고 말한 바 있다–이나 느릿한 영상도 연상된다.
여기에 음악까지 곁들였으니 작품이 갖는 감각과 형식의 공감대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다. 전시장 한 벽면을 이루는 미니멀한 무대는 하얀 백지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내포적 다양성이 있다. 이 공감각적인 설치작업은 드뷔시와 윤이상의 현대음악을 위한 배경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구상 단계부터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대화의 산물이다. 작가가 윤이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짧고 무기력한 삶에 견줄 수 없는 자연의 커다란 언어에 바탕을 둔 그의 음악철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하얀 바탕에 검은 얼룩들은 통영에 있는 윤이상의 육필 악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현대음악을 현대미술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상응이며 보다 깊은 시원에서의 조우이다. 벽 안에 배치된 각종 식물들은 그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로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지만, 거기에는 컬러사진보다 더 깊은 맛을 주는 흑백사진, 산문적 실제보다 더 운치 있는 시적 분위기가 있다.
자연과 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소우주인 이 정원은 ‘살아있는 구조’(롬바흐)이다. 정원과 무대의 중첩은 이 고즈녁한 시공간이 무엇인가로 꿈틀거림을 예시한다. 그 자체로 벽면을 이루는 힘찬 구조는 동시에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에도 흔들리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민감한 표면이다. 이러한 장치는 실물의 모사가 아니라, 실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것은 정원술 자체가 자연과 협력하여 만들어지는 예술임을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선택된 것이지만, 주어진 한계 안에서 강요됨 없이 스스로를 펼치고 접는다.
거대한 막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바느질 선은 인간을 위한 길이 되었다. 거기에는 인생이라는 여로 위의 군상이 있다. 막을 가로지르는 지평선 위의 작은 인간들은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풀 같은 작은 식물들을 거대한 숲으로 변모시킨다. 인간에게 공포를 줄 수도 있는 원초적이고 무질서한 숲이 아니라, 한가운데로 길이 열려있는 유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노동 없이 행복했던 낙원으로서의 정원이다.
이미지가 펼쳐지는 방식이 그림자라는 것은 그 자신은 소극적이면서도 타자들을 품는 넉넉한 자리임을 알려준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재현의 기원으로 그림자가 거울보다 먼저였음을 밝힌 바 있다. 예술적 재현의 탄생은 음화(陰畵)에 있다는 저자는 시각영역에서 이 두(그림자와 거울) 이미지의 근본원리가 광학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다름을 강조한다. 스토이치타에 의하면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최초의 재현 행위에 드러나는 원시적 속성은 최초의 회화적 이미지가 인간 몸에 대한 직접적 관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몸의 그림자를 잡아낸 재현물이라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이후 대세가 된 거울의 모델은 동일자를 정면에서 비추지만, 그림자는 타자를 측면에서 비춘다. 그것은 원형을 복제한 것 즉, 미메시스가 아니라, 닮아 보이는 것 만들기 즉, 시뮬라크라(simulacra)이다. 유한한 형식 속에 떠도는 허상이 메아리치는 무대는 대체의 마술이 펼쳐지는 시공간이 된다.
막에 비춰진 자연과 인간은 그것이 모두 덧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무한한 시공간에 찍힌 작은 점 같은 덧없음의 지표(index)이다.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 잠시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연극배우 같은 인생 말이다.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소리(음악) 또한 덧없다. 그러나 이러한 덧없음은 생명의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전시의 중요한 요소인 음악은 윤이상의 <두 개의 비올라를 위한 명상>이 연주(연주자 전진희)된 오프닝 공연을 필두로, 전시 기간 내내 이루어진 공연에 있다.
표본처럼 있는 식물조차 진동하는 무대는 음악처럼 시간의 흐름을 탄다. 무대는 다양한 시간적 형태들이 구성되는 장이다. 이 전체적 흐름 속에서 정지나 정적 또한 의미의 일부가 된다. 벽화가 그렇듯이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무대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빅토르 주어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사람들이 우주를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때는 우주의 운동이 아니라, 그들의 하모니 즉, 함께 소리 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지적한다. 빛과 색채, 소리, 냄새, 맛, 단단함, 유동성, 거칠고 부드러운 것, 뜨겁고 찬 것, 이들 모두가 무생물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음은 오로지 살아있는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덕현의 작품에서 음은 전적으로 살아있는 생에 속하며, 미술만큼이나 세상을 내다볼 수 있게 한다. 

이선영・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