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김호득 – 그냥, 문득
김호득 __ 그냥, 문득
김종영미술관 10.17~12.5
북악산과 북한산이 맞닿는 곳에 있는 김종영미술관. 입구에 걸린 전시 플래카드에서 작가 김호득 특유의 검은 획이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생명력의 분출, 나아가 근원적 생명개념을 탐색하는 작가가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미증유한 수묵의 세계를 펼칠지 미술관 초입에서부터 궁금증이 발동한다.
미술관 입구에서 신관 ‘사미루’로 연결되는 투명유리로 된 중간지점에 한지로 된 격자무늬 구조물이 먹물로 채워진 수조(4×7m) 위에 4개의 납작한 돌을 디디고 부유하듯 사뿐히 세워져 있다. 이전의 수조작업은 어두운 공간에서 순백의 한지들이 점진적으로 수조를 향해 내려오면서 먹물 속으로 측량할 길 없는 깊이를 반영하게 했다. 작가는 이 수직의 심연을 창조의 계시처럼 제시했다. 이 작업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시간과 공간의 한 특별한 틈에 고립되어 있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어두움과 수직성 대신 밝음,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그리드를 보여주고 있어서 작품의 부분들이 건물 안과 밖의 여러 요소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바람에 실려온 늦가을 햇살은 한지 구조물에 반사되어 수조 속으로 떨어진다. 수면에 반사/투영된 작품과 건축공간의 여러 층위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한정된 공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고 있다. 산세와 계곡의 흐름에 순응하여 배치된 미술관 공간에 맞춰 건물의 안과 밖, 자연과 인공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이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곳, ‘사미루(四美樓)’의 의미를 공감하게 한다.
계단을 따라 관람자의 동선은 자연스레 <계곡변주> 연작, <글자> 연작과 풍경추상화로 구성된 1층 공간으로 연결된다. 이 세 종류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연과 합일한 자아라고 하겠다. 특히 두 폭으로 나란히 배치한 <물>은 언어와 이미지, 형상과 소리의 경계를 단숨에 허문다. 쏟아져 내리는 물은 스스로를 광폭하게 소유하고 점차 녹아들다가 마침내는 대자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나는 다섯 개의 큰 화면으로 이루어진 <계곡변주> 앞에서 수묵화의 현대화를 위해 고군분투해 온 김호득의 40여 년 필묵 운용이 정점을 찍는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앞으로 그가 전개할 수묵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계곡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 온전히 선에 의한 골조만 남았다. 가시적인 대상을 점진적으로 소멸시켜 대상의 내면으로 진입한 결과, 농담 없이 순수한 먹으로만 무위자연의 본질을 추출하게 된 것이다. 광목천을 가르며 자유자재로 공간 유희를 하는 검은 획들은 계곡이선사하는 광시곡이 되어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3층으로 올라가면 브랑쿠시의 얼굴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응축된 둥근 형상의 소품들이 눈에 띈다. 젊은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작가의 의식을 지배하는 화두였던 자신을 향한 헌신의 표상인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계곡작업처럼, 작가 스스로 그림의 주제가 된 자화상에서도 이전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 대신 고뇌에 찬 인간의 정수를 정제해내게 되었다.
1년 전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김호득은 세로로 아주 긴 ‘人’자 형상의 수묵화를 선보였다. 자코메티의 절망적인 존재로서 비물질화된 가느다랗고 긴 인간 형상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에서도 주체는 작가 자신이다. 실존주의의 명제처럼, 김호득 또한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감과 싸우며 인간존재의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 <그냥, 문득>은 존재를 확인하는 찰나, 긴 기다림의 연장선상에서 건져올린 시간의 소중한 선물과 같은 것이다.
박소영·P.K. 아트비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