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류장복 – 투명하게 짙은
류장복 __ 투명하게 짙은
일민미술관 10.17~12.7
류장복의 긴 여행은 창에서 다시 시작된다. 철암과 한남동, 성미산을 두루 돌아본 작가는 이제 그의 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창을 통해 25편의 일상을 일기처럼 그리고 썼다. 창을 통해 보이는 그의 풍경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따라서 내일도 다를 수 있음을 상상한다. 같은 창밖의 각기 다른 풍경들은 작가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짧고 간결한 내러이션을 통해 두툼하고 짙은 그의 기억들이 깊은 바닷속처럼 푸른 빛으로 펼쳐진 사이로 사건과 사고가 끼어들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이라면 다 알 수 있을 처절한 슬픔이다. 시커먼 탄가루가 흩날리는 철암의 슬픔과 하루하루 더디게 견디는 삶의 터전을 써내려 온 작가의 그림 같은 글씨가 더욱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창은 안과 밖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연결되는 통로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검푸른 풍경은 우리의 눈을 현혹하여 흡사 그것이 진실로 존재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우리의 시지각 대부분은 기억에 의해 조작 혹은 지배된다. 해서 작가는 자신의 풍경이 기억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보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대변할 또 다른 작가 자신을 창 바로 앞에 세워놓았다. 흡사 장난감처럼 보이는 그 장치들은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이미 그러함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연주하고 설명한다. 그렇게 이중의 창들의 낯익은 풍경을 쫓아가다 덜컥 그 빛이 너무 짙어 투명한 슬픔을 만난다.
창밖 풍경 사이사이 일기 같은 일상 속으로 치고 들어온 그 짙은 슬픔들은 희미하고 불안하다. 느닷없이 터진 눈물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오히려 더 그칠 수 없었던 울음.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은 깊은 슬픔들. 기억을 더듬어 찬찬히 바라보던 그 풍경 속에, 우리의 일상 속에 숨은 슬픔은 결코 우리의 순수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듯하다. 넋놓고 바라보던 풍경 위로 겹쳐지는 사건들을 따로 끄집어낼 수도 기억 저편으로 밀어놓을 수도 없었던 작가는 최대한 담백하고 객관적으로 툭 던져 놓았다. 그래서 더 눈에 들어온다. 그 객관적인 사건들을 통해 신기루에 현혹된 사막의 이방인처럼 우리는 감춰놓았던 기억들을 아무 대책없이 좇게 된다. 심연으로 빠져드는 뱃머리처럼, 손가락 사이를 뚫고 흐르는 눈물처럼, 멍하니 응시하는 언론인의 힘 풀린 동공처럼, 잔뜩 밀려오는 한낮의 식곤증을 날려버릴 것 같은 가자지구의 검은 연기처럼 우리는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수상한 낌새들을 좇아 한 번 더 작가의 창너머 풍경들을 샅샅이 살피게 된다.
임대식·아터테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