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옥현 –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 세상
안옥현 __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 세상
사진 미술 대안공간 Space22 10.14~11.1
한쪽만 열린 가슴, 갈대밭, 거실의 그림들, 소도구들, 포즈들 (고립과 포옹), 캡션들, 은유적 전시제목 등등. 안옥현의 사진들 안에는 기호가 많다. 프레임 안과 밖에서 읽어주기를 요청하는 기호가 상당히 많다. 기호가 많다는 것 자체가 지적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포진한 기호들이 쉽게 메시지의 콘텍스트로 맺어지지 않는 건 아무래도 보는 이의 역량 부재 탓일 것이다. 이런 경우 기호들을 다 읽으려고 하기보다는 특정한 기호 하나에 집중하는 독법도 사진들을 나름대로 이해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터인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기호는 한쪽만 드러난 여인들의 가슴이다. 이 여인들은 왜 가슴 한 쪽을 열어 보이는 걸까, 아니 왜 한쪽 가슴은 숨기는 걸까. 그 드러냄과 감춤의 사이에서 안옥현의 사진들은 어떤 언술을 하는 걸까.
드러냄과 감춤의 유희를 가장 다의적으로 보여주는 놀이는 가면 유희다. 가면은 감추는 척하지만 사실은 드러냄의 전략이라는 점에서 게임이다. 모두 가리기, 반만 가리기, 아예 드러내기 등등 가면 유희는 다양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드러내고 싶은 것이 있으므로 가면은 동원된다. 그런데 이 가면 유희는 다름 아닌 욕망의 유희다. 욕망은 드러나면서 동시에 감춰진다. 그 감춰짐은 도덕적인 이유 따위가 아니라 욕망의 운명 때문이다. 욕망은 이미 눈떴으므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아직은 다 드러날 수가 없다. 욕망은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 실현의 대상은 아직 혹은 내내 부재하기 때문이다. 안옥현의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내면서 감추고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열린 가슴은 욕망으로 뜨겁지만, 감춰진 가슴은 그 욕망으로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목해야 하는 건 이 가슴의 변주, 욕망의 변주가 다른 사진들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포옹의 사진들은 부재하는 한쪽 가슴이 파트너로 실현되어 채워진 것처럼 읽힌다. 사랑이란, 특히 안옥현의 여인들에게 사랑이란, 자신의 다른 한쪽 가슴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포옹의 여인들은 그 파트너를 마침내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는 어쩐지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는 포옹하는 이들의 표정이 지극히 건조하고 더구나 불안해 보인다. 심지어 젊은 여인은 마치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파트너의 옷깃을 애타게 움켜쥐기까지 한다. 이 젊은 여인이 나이가 들면 코르셋의 여인들로 변주되는 걸까. 이제는 꽤 나이가 든 여인들은 코르셋을 입었는데 그 코르셋의 기호는 두 가지로 읽힌다. 하나는 다시 일어서기, 또 하나는 외출하기다. 어느 쪽이든 가슴이 코르셋으로 변주되기는 했어도 그 또한 욕망 운동의 리듬을 닮았다. 욕망은 이처럼 변주되어 다시 눈뜰 뿐 실현되어 멈추지 않는다. 가슴은 여전히 뜨겁고 욕망은 늙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세월은 흐른다. 그러니 어쩌랴?
결국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하는 건 빛이다. 안옥현은 빛을 강하게 사용한다. 그것이 의도적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 강한 빛이 용서 없이 드러내는 건 피조물의 육체다. 형태는 부드럽고 볼륨은 포만해도 여인들의 벗은 가슴은, 숨구멍이 엿보이는 생물학적 피부조직들은 그녀들의 육체가 불멸의 신이 아니라 세월을 떠날 수없는 피조물의 육체임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욕망은 뜨겁게 불타지만 시간은 욕망보다 더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걸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안옥현의 빛은 낭만적으로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강렬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영혼은 죽을 때까지 젊고 싶어도 육신은 나날이 늙어간다는 피조물, 그것도 여인이라는 피조물의 운명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진의 빛은 운명적으로 차갑고 잔인하다. 안옥현의 렌즈는 그 빛을 속이려 하지 않는다. 기호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들지만 그녀의 사진들에서 모종의 힘이 느껴지는 건 이 빛에 대한 정직함 때문일 것이다.
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