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   아무튼, 젊음

8.27~10.2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  8.29~11.9 코리아나미술관


글: 이문정 | 미술비평,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 중인 《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전시광경, 로렌 그린필드 〈 미스 시니어 아메리카 〉(사진 오른쪽)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8 ⓒ 로렌 그린필드, 인스티튜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 중인 《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전시광경, 로렌 그린필드 〈 미스 시니어 아메리카 〉(사진 오른쪽)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90×135cm, 2018 ⓒ 로렌 그린필드, 인스티튜트

백세시대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의학의 발전을 비롯한 환경의 변화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난 덕분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과거보다 노인으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일찍 죽지 않은 모든 사람은 늙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러운 이치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늙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에 대한 불합리한 편견 때문에 주로 노년기의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소외시키는 연령차별주의, 늙음을 두려워하는 노화공포증과 같은 용어도 등장했다. 《늙어감에 대하여(On Aging)》(1968)에서 장 아메리(Jean Améry)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젊어서 죽기를 원하지 않으며 누구도 늙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는 각종 산업과 매스미디어도 이러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늙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와 코리아나미술관의 《아무튼, 젊음》은 이러한 시대에 늙어가는 나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실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과 사유를 이끌어내는 전시다.

《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는 노화에 저항하는 인간의 욕망과 젊음과 늙음이 미와 추라는 이분법에 대입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불안한 욕망’, 나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회문제를 투영하는 ‘연령차별주의 신화’, 노년의 삶과 미래를 예측하고 대안을 생각하는 ‘가까운 미래’,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로렌 그린필드(Lauren Greenfield)의 사진들은 노년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외모를 화려하게 꾸미고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하는 이들이 부정적인 노인의 이미지를 해체하는 것인지, 나이 들어도 젊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따르는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안네 올로프손(Anneè Olofsson)의 〈 내일도 여전히 날 사랑해줄래요(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2004)는 오래된 회화처럼 얼굴에 균열이 생긴 여성들의 초상을 통해 나이 듦을 인지하면서 겪게 되는 불안감을 재현한다. 젊음이 중요한 가치가 된 시대에 중년의 여성은 주변으로 밀려날 확률이 높아진다. 소외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는 젊음을 붙잡아놓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줌마’라는 프레임에 갇혀 편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늙음에 부정적인 의미가 겹쳐지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는 늙어갈수록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늙지 않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윤지영의 〈 불구하고 〉(2018)에 등장하는 아킬레스(Achilles), 지그프리트(Siegfried), 탈로스(Talos)가 그렇듯 종말에 이를 것이다. 영원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늘 좌절된다. 이병호의 〈 바니타스 흉상 〉(2010)이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횟수가 쌓일수록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육체의 쇠락을 벗어날 수 없다. 아버지의 임종, 어머니의 치매를 담아내는 삼프사 비르카예르비(Sampsa Virkajärvi)의 작업에서 드러나듯 모든 인간은 몸과 마음의 상실을 거친 뒤 마지막 숨을 내쉴 것이다. 그런데 삶의 마지막을 향하는 과정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노년이 소외되고 외로울지,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할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은 경제적 여유이다. 일상의실천이 제작한 〈 골든 실버타운(Golden Silver Town) 〉(2019)에서 노후 생활을 설계하다 보면, 나이 듦과 죽음이 돈으로 환산되는 차가운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나이 듦은 우리를 다양한 난제 앞으로 데려간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아무튼, 젊음》 전시광경, 마사 윌슨 〈 나는 내가 가장 무서워졌다 〉(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사진 프린트, 220.9×111.7cm, 2009,〈 변형 〉 video transferred to DVD 7분59초 1974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아무튼, 젊음》 전시광경, 마사 윌슨 〈 나는 내가 가장 무서워졌다 〉(사진 오른쪽) 캔버스에 사진 프린트, 220.9×111.7cm, 2009,〈 변형 〉 video transferred to DVD 7분59초 1974

코리아나미술관의 전시 《아무튼, 젊음》에서는 늙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압박감에 대해 숙고하는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은 늙음과 젊음의 이분법을 흐트러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산야 이베코비치(Sanja Ivekovi )의 〈 인스트럭션 #1(Instruction #1) 〉(1976)과 〈 인스트럭션 #2 〉(2015)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여성)의 처절한 노력과 허망함을 병치시킨다. 늙음을 지연시키기 위한 노력이 무색하게 40년이 지난 얼굴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젊어지려 하는가? 그것은 “젊고 아름다우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전지인의 〈 Folder: 직박구리 〉#젊음(2019)에 적힌, 나이 듦을 은유하는 문장들을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이유는 노화와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아리 세스 코헨(Ari Seth Cohen)이 포착하는 노년의 패션 피플(fashion people)처럼 자신만의 취향과 개성을 담아내며 노인다움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을 고정된 틀을 깨뜨린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존재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서 파생되는 질문도 있다. 사진 속 인물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인쇄된 “Old is the new black”은 노년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인가? 아니면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 유행인가? 또 다른 질문도 따라온다. 우리는 노년이 담아내는 다양함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노년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획일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안에 담긴 다양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아무튼, 젊음》이란 전시 제목은 그 자체로 양가적이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 못지않게 행복할 수 있음을 뜻하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도 무조건 젊음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지,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 결말 역시 매번 바뀔 것이다. 몸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는 나이 든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셀린 바움가르트너(Seline Baumgartner)의 〈 아무것도(Nothing Else) 〉(2014)가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만큼 생각의 시간도 길어진다. 그 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인간은 일생의 어느 순간부터 늙음에 대한 저항과 순응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늙음은 젊음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이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시간이다.

《에이징 월드 –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2019. 8. 27 ~ 10. 2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아무튼, 젊음》
2019. 8. 29 ~ 11. 9
코리아나미술관

●  < 월간미술 > vol.417 | 2019.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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