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 심 래 정
⠀⠀⠀⠀⠀⠀
심 래 정 | Sim Raejung
1983년 태어났다.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 생.활 〉(2019), 〈 B컷 드로잉 〉(2018), 〈 아트스펙트럼 〉(2014), 〈 젊은모색 〉(2013) 등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전시장은 한마디로 어둠과 그로테스크의 향연이다. 게다가 사운드까지 음험하다. 그야말로 잔혹극의 세트장 같은 심래정의 수상한 수술방은 육체를 절단하고 재봉합하여 변이의 산물을 만들어낸다. 그의 개인전 〈 B동 301호 〉(6.20~8.25,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욕망을 행위로 옮길 수 없는 제약이 제거된 일종의 해방구이자 인간 본성을 돌아보게 만드는 실험실을 닮아 있다. 심래정의 음산한 방에 발을 디뎌보자.
⠀⠀⠀⠀⠀⠀⠀⠀⠀⠀⠀⠀⠀⠀⠀⠀
언어가 끝나는 곳에
이수정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미술에 대한 글과 말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미술이 더 이상 ‘시각예술’의 영역 안에 머물지 않고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시대라는 예술 내부의 변화 때문에, 또는 각종 기금, 수상제, 레지던시의 ‘공정한’ 심사를 위해 자기소개서, 작가노트, 작업계획서, 작가 프레젠테이션, 인터뷰 등 미술을 보는 시간보다 작가의 글을 ‘읽고’, 말을 ‘듣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나고 있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는 말, 하인리히 하이네가 남긴 이 문구를 사람들은 ‘음악’의 자리에 ‘시’, ‘사진’ 등 여러 말을 넣어 인용한다. 예술작품을 언어로 명징하게 해석하고 풀어내려는 욕망이 예술에 대한 많은 텍스트를 만들어내지만, 예술은 그 모든 명확하고 적확한 용어들의 총합을 넘어서기도 하고, 언어 없이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심장에 꽂히기도 한다. 즉, 어떤 경우에 예술에 대한 글은 실패하거나, 불필요하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이미지가 시작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 젊은 모색 2013전 >과 관련하여 진행한 인터뷰에 참여한 심래정 작가가 예술에 대한 생각을 묻자 내놓은 답이다. 도록에 들어갈 작가 소개글을 쓰기 위해 만났을 때, 그는 작품을 보여주었고, 질문에 간간이, 느리게, 짧게 답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 대한 글이나 관련 기사는 당시 사회적 화두가 되던 “‘층간소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다룬 드로잉 애니메이션”. 이렇게 간명한 문구로 소개되었다. 이 문구는 분명 ‘거짓’은 아니었으나, 심래정의 작품을 제대로 포착해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층간소음에 대한 경험이 분명 작가의 경험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이 층간소음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사회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간주될 행동들, 그 행동들을 촉발한 감정과 욕망, 폭력성, 인간의 본성과 본능 등 여러 속성이 ‘매끌매끌한’ 언어 뒤에서 들끓었다. 왠지 그 부분을 건드리지 못한 채 중심에 가 닿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돌고 있거나 투명한 장막 앞에 서 있는 듯했다. 그래서 당시 ‘이미 실패한 글’이라 판단했지만, 어쩌면 애초부터 심래정의 작품을 보는 데 글은 불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았다. 감상자로서 본 < 층간소음 > 연작은 살인과 성교 등 만약 실사 영화라면 잔혹하여 불편할 수도 있을 법한 장면들이 빠르게,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기승전결도 파악하기 힘들고, 장면의 전개도 예상하기 힘들다. 각 드로잉은 작가의 말처럼 ‘단어’와 같았고, 그 단어들은 문법에 맞는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어 언어화와 논리화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시선을 붙잡았고, 언어라는 성긴 그물로 붙잡기 힘든 날생선처럼, 힘차게 펄떡거렸다.
< 층간소음 1 > 스틸컷,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2-채널 비디오, 서라운드 1분57초, 2012
이 대목에서 2018까지 3년간 진행한 < 식인왕국 > 연작은 좀 더 직접적으로 살인과 식인의 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살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인육을 먹은 사건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를 소재로 < 식인왕국: 수상한 신호 >(2016)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살해된 후 인육 통조림이 된 희생자 모넬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 식인왕국: 생산 공장 >(2017)을 만들었고, 지난해 마지막으로 과학적 수사가 불가능할 때 사건과 관련된 물건에 손을 대어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수사법인 ‘사이코메트리’를 소재로 한 < 식인왕국: 심령수사 >(2018)를 완성했다. 연쇄살인에 대해서 조사하던 중 작가는 식인 행위를 하는 연쇄살인자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유년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욕구의 결핍을 여성을 살해함으로써 해소했다고 한다. 또한 인육을 먹는 행위가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피해 여성의 몸과 마음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살인, 식인 모두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이지만 그 원인과 기원을 추적하면, 의외로 그 끝은 우리 대부분이 갖고 있는 결핍과 좌절, 보상심리 등과 닿아 있다. 실패한 관계와 그로 인한 좌절, 집착으로 변질된 애정, 나 혹은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 무리한 선택 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크고 작게, 경험하는 일상이지 않은가.
극단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심래정은 오히려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의 속성을 통찰해냈다. 다음은 심래정이 표지를 그린 책 ≪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에 남긴 소개글이다. “여러 관계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인간은 상대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파괴하려는 본능이 있다. 나는 그것이 식인 행위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비인간적 행위로 생존,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 한다.” 실제로 식인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차원에서 상대를 파괴하고, 살아남으려 한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대상이며, 집착과 애착을 구분하기는 때로 어려우며, 실패한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주고받고, 기대하고, 좌절하며, 그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생존’의 본능이다. 그 대상이 우리의 몸이든, 영혼이든. 이런 관계의 속성,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햇빛 앞에 명확하게 보여주기보다는 그늘 속에 숨겨 두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다. 심래정의 전작들에 등장한 잔혹한 행위와 감정들은, 우리가 그늘 속에 묻어두고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이며, 동서고금 인류사에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애써 ‘비인간적’, ‘비정상적’이라고 낙인 찍는 행위들이다.
< 수상한 신호(suspicious signal) > 스틸컷, 핸드 드로잉 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서라운드 반복재생 2016
비명, 절규 그리고 봉합
는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공간을 일종의 수술실로 연출했다. 3편의 영상이 붉은 벽면에 상영되는 그 앞에 각종 오브제들이 놓여 있어 마치 연극 무대나 영화의 세트장과 같은 공간에 관객이 들어가게 된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는 ‘봉합’이다. 과거 작품에서 공간은 신체를 토막 내는 살인과 파괴의 공간이었다면, 에서는 토막 난 것들을 이어 붙이는 수술실이다. 작가의 드로잉에 등장하는 수술 침대와 카트가 직접 제작한 영상 앞에 놓여 있다. 수술실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실과 도구들까지 높여 있으며, 수술대 위에는 토막 난 인체가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계단 위 공간에는 역시 드로잉에 등장하는 붉은 내장으로 된 호스 끝에 연근 형태의 샤워기가 달려 있다. 구 공간 사옥의 붉은 벽돌 틈새에는 두 개의 머리가 성공적으로 봉합된 인체가 숨어 있다. 봉합한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머리가 봉합된 상태이기에 불편해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 벽돌 틈새에 숨어 있는 이 인물은 분명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듯하다. 그는 지금 이 상태를 불평하는 듯하지 않다.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두 개의 얼굴은 때로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상반되는 존재가 공존하는 양상일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일까. 혹은 내가 떠나보냈지만, 마음으로 보내지 못한 그 누군가의 잔상일까. 어느 쪽이든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머리는 다양한 상상과 해석을 촉발한다. 심래정의 작품은, 무엇인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생각을 뻗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붙잡는다.
아라리오미술관 인 스페이스 개인전을 앞두고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다시 한 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말이 시작된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본 작가는 여전히 말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명이든 절규든, 그 무엇이었든, 어떤 소리로든 그는 작품으로 말을 건넬 수 있는 작가이고, 그 목소리는 더 깊고 울림이 커졌고,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 < 월간미술 > vol.414 | 2019. 7월호⠀⠀
© (주)월간미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