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ARTIST | 김 성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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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박홍순

사진 | 박홍순

김 성 희 Kim Seongheui

1963년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덕원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대학교 관악사학생생활관장,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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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빛나는 수없이 많은 별처럼 인간 역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빛난다동양화가 김성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선과 점은 아름답게 빛나는 별과 같다. 그의 그림은 모든 생명체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월 12일부터 21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TRANSPARENTER〉라는 타이틀로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신작 〈 별 난 이야기〉 시리즈를 통해 사물과 존재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소멸과 탄생의 과정이 윤회하는 자연 만물과 인간 세상에 대한 주제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생각을 미술평론가 최열과 함께 문답식으로 풀어낸다.

 


〈 별 난 이야기 1702〉 한지에 먹과 채색 170.2×138cm 2017

〈 별 난 이야기 1702〉 한지에 먹과 채색 170.2×138c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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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투명한 별빛, 그 생성과 소멸의 세계
글: 최열 |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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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도 맑아 시리기조차 한 가을날 〈김성희 개인전 TRANSPARENTER〉가 열리는 조선일보미술관 벽면을 통해 나는 별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2013년 갤러리한옥에서 마주친 그의 개인전 〈Who am I am Who〉 이후 5년 만이다. 처음 내가 꺼낸 말은 “멀어지면 아련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요란한 것이 어찌 그리도 아름다운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한 비평가의 질문과 세 시간에 걸친 작가의 응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화가의 말을 포함해 모두 나의 문자다.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김성희 개인전 〈TRANSPARENTER〉 전시 광경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김성희 개인전 〈TRANSPARENTER〉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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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이하 최)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김성희의 작품은 ‘끝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방황하는 와중에도 정착해 있는 이상한 그런 느낌이에요. 작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경계지대 또는 중간지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키우던 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성희(이하 김)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는, 부산에서 지내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품었습니다. 훗날 김인환 선생님 화실에 나갔는데 선생은 언제나 나를 ‘작가’로 대우하셨어요. 나는 내가 작가인 줄 알았고, 해서 그림을 그릴 때면 ‘나만의 작품세계를 고민’하며 임했었죠. 파리 유학의 꿈을 안고 말이죠. 또 하나는, 입시 준비에 한창이던 때 잠깐 졸은 적이 있어요. 놀라운 건 그 순간에도 계속 그렸고 깨보니 다를 바 없었다는 겁니다. 그 때 깨우친 건 그림이란 내게 운명, 하늘이 주신 소명이란 거였죠.

〈 별 난 이야기 1705 - 투명나무〉 한지에 먹과 채색 90×48.7cm 2017

〈 별 난 이야기 1705 – 투명나무〉 한지에 먹과 채색 90×48.7cm 2017

그런 걸 신의 붓이라 하지요. 김성희에게 신은 무엇입니까.

저는 범신론자(汎神論者)입니다. 만물에서 초월적 존재의 기운을 느끼는 거지요. 모든 생명체의 고귀함을 믿습니다.

김성희에게 ‘우주’는 무엇입니까.

아득한 옛날 대폭발이 있었고 우주 cosmos가 탄생했습니다. 그 혼돈을 거쳐 태양계와 지구 그리고 새와 나무와 인간이 탄생했는데 그것은 하나의 긴 선(線)이고 생명을 이어주는 띠와도 같은 거지요.

그렇다면 ‘별 난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별 난 이야기’는 ‘별이 탄생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전시장 벽면에 새겨둔 말을 인용하자면 “별자리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꿈, 이상, 욕망이 투영되며 ‘의미’와 ‘생명성’으로 탄생한다”는 것이죠. 별은 우주와 함께 형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그 별이란 그 별빛이 지구에 닿을 때까지 몇 백, 몇 천 광년의 세월이 흐른다지요. 우리가 보는 별은 그러니까 아득한 옛것이라고 합니다.

억만년의 아득한 실체를 보여주는 그 빛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별자리란 원래 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별이란 실체는 있지만 그것을 보는 인간은 사라진 빛을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텅 빈 공백을 차지하고 있는 그 사라진 실체와 눈에 보이는 빛을 연결하는 선, 그 띠가 바로 별자리일 겁니다. 나는 그 실체와 공백을 동시에 긍정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허무가 아니지요.

〈 별 난 이야기 1703〉 한지에 먹과 채색 170.2×138cm 2017

〈 별 난 이야기 1703〉 한지에 먹과 채색 170.2×138cm 2017

생성과 소멸, 존재와 해체, 근원과 현상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포괄하고 싶어 하시는군요.

그것은 ‘방향성’이 있어서일 겁니다.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지는 조형에서 점과 면은 확장과 수축일 뿐이지만 선은 방향이고 점들을 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란 방향이자 지향이며 꿈이자 이상입니다.

인간 의지의 반영 같은 것, 그렇군요. 그 같은 깨우침을 얻은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01년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저는 온몸과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밤샘작업을 하고 퇴근하던 길에 급작스러운 사고로 아킬레스건이 끊겼고 이 때부터 1년 동안 주저앉았어요. 고통과 우울이 지배하던 세월이었는데 문득 깨우쳤어요. 내 몸은 내 꿈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라서 마구 쓰면 그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 몸은 한낱 도구가 아니라 곧 내 꿈이고 이상이며 방향성을 갖는 지향으로서 인간의지의 정수임을 알아차린 겁니다.

소우주임을 깨우친 거네요. 이야기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선생님에게 ‘사회’는 무엇입니까.

사회는 사람이 살아가는 구조, 하나의 구조겠지요. 구조란 어떤 이념, 어떤 가치에 의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가 지향하는 어떤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람 개개인에게는 굴레라는 것이겠지요.

누군가에겐 굴레지만 또 누군가에겐 가치일 겁니다. 이를테면 자기가 속한 사회를 위한 행동이라고 해도 사뭇 다를 수 있어요. 가미카제(神風)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조직의 의지로써 온전히 자기만의 이익과 욕망을 위한 행위이지만 이웃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행위는 평화를 위해 자율의 의지에 따라 자신을 버리는 행위 아닙니까. 집단과 개인의 경계가 거기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 별 난 이야기 1804〉 한지에 먹과 채색 212×150.4cm 2018

〈 별 난 이야기 1804〉 한지에 먹과 채색 212×150.4cm 2018

구조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한계가 있고 따라서 어쩌면 욕망과 겹쳐 출렁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있어요. 나의 작품 < 투명인간>은 의식을 지닌 인간의 어떤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 의지는 방향을 지니고 있죠. 욕망이 한계치를 넘어설 때 그 방향을 그리는 선은 무엇인가. 계속 질문합니다. <투명인간>은 두 폭의 그림을 겹친 것입니다. 하나는 실체를 그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림자를 그린 것입니다. 이 두 폭을 겹치면서 그 위치를 약간 어긋나게 합니다. 그래서 아주 또렷했던 것이 어정쩡해지고 선명했던 것이 불투명해지면서 어정쩡한 틈새도 엿보여요. 또 그 인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정쩡한 자세로 어정어정 걷습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아주 무상(無常)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지요. 결정하지 않은 상태 그 무상한 상황은 어쩌면 본연의 존재로서 인간이겠지요.

무상을 직역하면 ‘항상 없다’는 뜻인데 덧없음 이런 것 아닌가요.

아니지요.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무상이란 희망이지요. 무상이야말로 본연의 상태이고 변함없는 가치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나는 < 별난 이야기 - 묘화도>를 그릴 적에 고양이 발에 오리나무 열매를 여러 차례 달여서 내린 즙을 묻혀 걸어 다니도록 합니다. 그다음 발자국을 연결하는 선을 그려요. 고양이는 별을, 저는 별자리를 만든 거지요. 내가 판단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물음이고 깨우침인데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거겠지요. < 별난 이야기 1804>의 귀고리에 그 생각을 새겨두었습니다. 귀고리가 물음표이자 곧 느낌표라는 사실을 잘 보아야 합니다. <별난 이야기 - 투명옷>은 나의 학위복인데 옷걸이의 어느 부분이 물음표예요. 그리고 귀고리와 옷걸이에 금빛을 칠해 두었습니다.

〈 별 난 이야기 1810 - 투명옷〉 한지에 먹과 채색 180.3×126cm 2018

〈 별 난 이야기 1810 – 투명옷〉 한지에 먹과 채색 180.3×126cm 2018

작품에 나타나는 것이 사람이건 새나 나무건, 옷이건 간에 가까이 다가가면 온통 매화로 보입니다. 형태는 물론이고 색감이나 질감도 부드럽고 고와서 아름답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아름다움은 한결같아요.

별이건, 매화건 그 모든 것, 그 모두를 고귀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살아있는 것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나의 모든 작품이 갈색인 것은 바로 그 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으니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형식과 내용이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욕망을 지닌 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방향성이라는 나의 주제 내용은 곧 선이라는 조형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모든 작품에 일관하는 조형요소들이 왜 따스하고 은은한지, 그것이 가볍거나 얇지 않고 한없이 무겁고 깊은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투명나무 >에는 테두리에 푸른 빛깔이 둘려 있고, < 별난 이야기 1803>에는 미소가 숨어 있으며, < 별난 이야기 1702>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지저귀고 있네요. 그런 김성희에게 예술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예술은 ‘무상한 상황’이고 또 그것은 ‘노니는 것’입니다.

뒷짐 진 채 거니는 저 소요유(逍遙遊) 같은 것.

아니, 이미 있는 어떤 개념을 따르는 게 아니라 판단 없이 그저 마냥 노니는 것입니다.

(왼쪽부터) 〈 별 난 이야기 1812〉 한지에 먹과 채색 211×149cm 2017 〈 별 난 이야기 1813〉 한지에 먹과 채색 100.8×82.7cm 2018 〈별 난 이야기 1811 〉 한지에 먹과 채색 211×148.2cm 2018

(왼쪽부터) 〈 별 난 이야기 1812〉 한지에 먹과 채색 211×149cm 2017 〈 별 난 이야기 1813〉 한지에 먹과 채색 100.8×82.7cm 2018 〈별 난 이야기 1811 〉 한지에 먹과 채색 211×148.2cm 2018

지난 반세기 동안 수묵채색화가에게 거대한 늪과도 같은 수렁은 한국성이었고 또한 여성화가에게 벗어날 수 없는 멍에와도 같은 짐은 여성성이었다. 하지만 화가 김성희에게 그런 질문은 덧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과 남성은 분리된 합체이자 합체인 분리로서 모두 고귀한 존재이며 한국이란 세계와 이방이라는 세계는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것이기도 한 하나의 세계이니 말이다. 그에게 모든 개별적인 것은 그만의 특성을 빛내는 것이며 차원을 달리할 뿐 차별의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여성성은 작품의 주제 내용이나 재료 기법 모두에서 유연과 현묘함으로 수미일관하게 드러나고 한국성 또는 동양성은 주제 내용이나 재료 기법에서 범신론과 천연성으로 충만하게 드러난다.

3시간 내내 답을 들었지만 그 답은 끝도 가도 없는 질문이었다. 마주하는 내내 19세기 위대한 철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3)가 화가를 가리켜 ‘물속에서 물을 그리려는 자들’이라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란 뜻인데 대화가 끝날 무렵 문득 생성과 소멸,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서 노닐고 있는 별과 그 별을 이어가려 혼신을 다하는 한 화가를 발견했다. ●

●  < 월간미술 > vol.406 | 2018.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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