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글 : 마정연 | 미술사
고든 마타 클락(1943~1978) 타계 40주년을 맞아 마타-클락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6월 19일부터 9월 17일까지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다. 국내에서도 광주비엔날레(2008) 특별전이나 다큐멘터리< FOOD(Day inthe life of FOOD) >(1971~1973)를 소개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미각의 미감전>(2016) 등이 열린 바 있지만, 마타-클락의 전 생애에 걸친 활동을 망라한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마타-클락의 폭넓은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데에는 1985년 시카고현대미술관의 회고전 영향이 컸다. 한편, 영상작품 대부분이 수리 복원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92년의 유럽 회고전이었다. 나아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고든 마타-클락 재단과 캐나다건축센터가 아카이브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2017년 포르투갈, 독일, 미국에서 열린 개인전에 이어, 올해는 일본과 프랑스, 2019년에는 에스토니아에서 개인전 개최가 예정되어 있다.
경계가 없는 아티스트
1943년 6월 22일 뉴욕, 칠레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로베르트 마타와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앤 클락 사이에서 고든과 세바스찬(애칭 바탄) 쌍둥이가 태어났다. 부부는 그 후 이혼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쌍둥이의 대부였던 마르셀 뒤샹은 마타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형제는 어머니 주거지인 맨해튼과 아버지가 생활하는 프랑스, 이탈리아를 오가며 성장했다. 1968년에 코넬대학 건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고든 마타(당시)는 이듬해 동 대학에서개최된 에 어시스턴트로참가했다. 거기서 호수의 얼음을 절단하는 데니스 오펜하임의 작품을 비롯해,
로버트 스미스슨, 한스 하케 등의 자연 풍경을 바탕으로 한 조각 제작을 도운 뒤, 뉴욕으로 돌아와 출품 작가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간다. 그해, 1969년부터 서른다섯의 나이에 요절하는 1978년까지 1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이 그가 아티스트로서 활동한 기간이다. 더구나 그 활동 범위는 작품이나 전시회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다양했다.
활동의 거점은, 1970년 가을에 친구들과 스스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라고 명명하고 살기 시작한 독립 운영 아트스페이스 그린 스트리트 112번지였다. 우뭇가사리를 소재로 연금술적인 공간을 연출한 첫 개인전 < Museum>을 개최한 것도 같은 해의 일이었다. 1971년 마타-클락으로 이름을 바꾼 후부터 그의 작업은 퍼포먼스, 영상, 사진, 설치, 그래피티, 글, 그리고 생전에는 공개되는 일이 드물었던 드로잉 등 다양한 미디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Anarchitecture Group과 같은 예술가 네트워크 결성(1973), 레스토랑 FOOD 공동 운영(1971~1973)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선 커뮤니티 만들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각기 다른 의미의 위상과 다양성 안에서도 개별 작품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 Bronx Floors > 시리즈(1972~73), < Splitting>(1974년 3~6월에 제작, 8월에 철거), < Day’s End >(1975년 6~8월), < Conical Intersect>(1974년 9월 19일~11월 2일), < Office Baroque >(1977년 10월 8일~11월 6일), < Circus or Caribbean Orange>(1978년 1월 28일~2월 13일) 등의 대표작들은 도시 개발 논리에 저항하는 공간의 재구성으로 독해되지만, < Garbage Wall >(1970)이나 < Winter Garden: Mushroom and Waistbottle Recycloning Cellar >(1971)가 암시하는 가치 전환에 의한 재생이라는 테마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도시공간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 Tree Dance>(1971)와 < Jacob’s Ladder>(1977)와 같은 공중에의 개입, 뉴욕이나 파리의 지하에서 작업한 사진 프로젝트, 겨울에 벚나무를 심고(< Cherry Tree>(1971)), 말라 죽은 그 나무를 땅속에 묻어(< Time Well >(1971)) 유기적인 생명력으로 변용되는 토지, < Reality Properties: Fake Estates >(1973)에서 콜라주한 부동산 구매 기록으로서 기호화된 토지에 이른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전시회라는 형식을 통해 접하는 마타-클락은, 작가 본인과 작가가 관여한 장소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기록 자료들에 의해 묘사된다. 작가 사후, 앤트워프의 < Office Baroque>를 보존하기 위해 유족과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사무 노구치, 줄리안 슈나벨 등 아티스트 200인 이상이 힘을 합쳐 노력했지만, 결국 1980년에 예고 없이 철거되고 말았다. 도시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을 변화시켜, 그 최종적인 상태를 전시회로 삼은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 작업의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기록 속에서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의 신체가 조금은 폭력적인 인상을 주는 ‘빌딩 컷(building cut)’ 제작 수법과 어우러져, 기성의 권력에 저항하는 영웅적 이미지로서 신비화되기 쉬운 것은, 물질로서의 기록에서 전해지는 긴 시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고든의 작품을 구한 것은 그것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든을 구한 것은 그가 반항적인 행위를 한 이후에 무대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고든에 대한 신화는 이유 없는 반항의 신화 속에 살아남아 있다.(What saved Gordon’s work is the fact that it didn’t survive very long. What saved Gordon was that he did these rebellious actions and then he left the stage. Somehow, Gordon’s myth survives in the rebel-without-a-cause myth.)” 작가의 임종을 지켜본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인 레스 레빈은 마타-클락의 패러독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고든 마타-클락을 전시하기, 라는 문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의 큐레이터 미와 겐진(三輪健仁)은, 야마나시대학교의 히라노 지에코(平野千枝子)와 5년간의 공동연구에 기초하여 이번 전시를 기획 구성했다. 이 전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200여 점의 조각, 영상, 사진, 드로잉, 관련 자료들을 시간 순서대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5개의 ‘장소’에 따라 카테고리를 분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카테고리란 (1) 주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과 기억 / (2) 스트리트: 에너지의 순환과 변용 / (3) 항구: 물과 육지의 경계 / (4) 시장: 자연에서 문화로의 변용 / (5) 뮤지엄: 마타-클락을 전시하기 등이다. 이에 근거해 와세다대학교 건축학과의 고바야시 게이고(小林恵吾)와 그의 연구실이 ‘플레이그라운드’를 테마로 하는 전시 디자인을 실현했다. 카탈로그에 수록된 고바야시와의 대담에서 미와는, 마타-클락 전시의 어려움으로 화이트큐브에 전시하면 장소특정성과 퍼포먼스적 측면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없는 것’과의 거리가 강화되는 패러독스를 지적했다. 이러한 과제에 대해 그는 이미 있는 장소에 작품을 놓는 행위로 개입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작품에 대해 장소를 나중에 배치하는 개입의 가능성을 생각했고, 감상자의 경험의 변화 가능성을 실험했다.
전시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은 개성적인 전시 디자인이 감상 경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되돌아보고 검증할 타이밍이 아니지만, 마타-클락이, 공간 속에 오브제를 두는 것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를 오브제로서 다뤘기에 의미 있는 실험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본 ‘장소’는 전시회 전체의 문제의식과 깊이 관련된 ‘뮤지엄’ 섹션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작가 최초의 개인전부터 최후의 작업을 동시에 다룰 수 있게 한다. 칠레인민연합정권의 탄생 직후였던 1971년, 그는 일반 민중에게 열린 시설로 개조 중이던 칠레국립미술관의 지붕에 작은 구멍을 뚫어 홀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공간에 빛이 떨어지게 하고, 그곳에 거울, 벽, 사진을 배치한 공간을 연출했다. < Untitled (Bellas Artes Cutting)>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지만, 칠레국립미술관은 마타-클락이 절단 행위로 개입한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 되었다. 한편, 최후의 건물 절단 작품은 시카고현대미술관의 < Circus or Caribbean Orange>이다. 위법 상태로 제작되거나, 완성 직후에 철거되거나, 출입금지 처분을 받은 예전 작업들과는 대조적으로, 미술관의 의뢰로 실현된 이 프로젝트에서는 관객들이 투어 형식으로 작품 안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이들 작품과 함께 전시된 < Proposal for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1978)은 마타-클락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2019년 준공예정으로 현재 진행형의 뉴욕현대미술관 증축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리얼리티를 느끼게 한다.
힘을 부여하는 예술
앞에서 언급한 FOOD는 평일에는 보통 레스토랑으로서, 주말에는 게스트 아티스트 요리사가 원하는 요리를 하는 식으로 약 3년간 운영되었다. 라우센버그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히사치카(高尚愛)가, 당시에는 좀 생소하던 일본의 날생선 요리(초밥)을 만들어 소호의 아티스트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차이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FOOD를 베를린의 스튜디오 올라퍼 엘리아슨 다이닝 부문 The Kitchen의 원형으로 보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레스토랑에서 저렴한 요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일부러 도로에서 고기를 통째로 구워 지나가는 사람들을 커뮤니티로 유도했던 마타-클락의 미각과 취각의 커뮤니케이션은, 갤러리에서 팟타이나 카레를 제공했던 1990년대의 리크릿 티라바냐와 겹쳐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티라바냐를 비롯한 작가들의 실천을 사례로 들어 ‘관계성의 미학’을 논한 니콜라 부리요, 그에 대한 클레어 비숍과의 논쟁, 그로 인해 부각된 예술 안의 참여와 대화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는 1970년대의 뉴욕에 그치지 않는, 우리들의 동시대적 문제인 것이다.
이번 전시회 오프닝에 참석하기 위해 고든 마타-클락 재단의 공동 디렉터가 일본을 방문했다. 1975년 마타 클락을 만난 이래, < Office Baroque>, < Circus or Caribbean Orange> 등의 후기 작품에 참여했고 마타-클락이 죽기 3개월 전인 1978년 5월에 결혼식을 올린 제인 크로퍼드(Jane Crawford)와 그로부터 2년 뒤에! 태어난 그녀의 딸, 큐레이터 제사민 피오리(Jessamyn Fiore)다. 기자회견에서 크로퍼드는, 커뮤니티 안에서 모두에게 사랑받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타-클락이라는 아티스트의 모든 것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미술의 범주를 넘어 실제 세계의 문제에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오리는 마타-클락이 가능한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위한 플랫폼과 같은 아티스트라고 했는데, 그는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부터, 사회 속의 예술, 나아가 사회를 위한 예술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지점에 위치한 실천가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전의 마타-클락이 습관처럼 말하곤 했던 “이게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인데, 당신이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This is a solution I suggest, but you could do it better.)”란 항상 미래의 세대를 향한 말이며,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는(empowerment)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마타-클락의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이 갖는 의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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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월간미술 > vol.405 | 201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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