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5
같이 식사할래요?
이따금 사람들은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런데 식사는 어떻게 해요? 늘 사먹어요? 점심과 저녁 모두?”
“그게… 해먹기도 하고, 사다 먹기도 하고 그래요.”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대충 먹고요, 아니면 그냥 굶어요…’다. 한 블록만 걸어나가도 낮이건 밤이건 맛집을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그만큼 맛집이 많다고 소문난-연남동에 살면서도 밥 먹는 일은 매일 고민되는 일이다.
처음엔 점심 한 끼는 만들어 먹을 계획이었다. ‘원플레이트 퀴진(one plate cuisine).’ 접시 하나에 담기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식사를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메뉴도 짜고 레시피북도 만들었다. 핫플레이트와 전기밥솥을 포함해서 프라이팬, 냄비, 국자와 집게 등 몇 가지 기구들도 구비해두었다. 그러나, 먹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재료 준비- 조리-식사- 뒷정리로 이어지는 과정이 길고 번잡했다. 작업실에는 싱크대도 조리대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음식이라 해도 너저분한 상황을 초래했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음식냄새가 나는 것이 무척 거슬렸다. 음식 냄새가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책이다, 책. 그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소설가의 북 콘서트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 작업실을 구한 그 소설가는 작업실에서는 집필 외의 활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도 작업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생활의 흔적이 끼어들지 않는 무균의 장소로 남겨두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 소설가의 목소리에 깊이 감화했다. 그리하여 원플레이트 퀴진의 생활화를 선언한 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작업실에서는 절대 요리를 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실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도, 가끔씩 뜨거운 밥과 가벼운 반찬들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나 간단하고 심심하게 만든 파스타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한 끼를 때우려고 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나, 이 동네에는 심심하고 가벼운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서운할 때를 대비해 냉장고에는 몇 가지 재료들이 늘 구비되어 있다.
얇게 저민 마늘과 흑후추, 올리브오일로 맛을 낸 파스타. 리넨 클로스를 깔고 파스타를 그득 담은 접시를 놓고 커트러리를 얌전히 놓는다. 여기에 바게트 몇 조각을 곁들인다. 타임이나 바질을 좀 뿌리고 싶지만 이 정도도 근사하다. 밥을 먹고 싶다면 잡곡밥에 김, 명란젓, 가벼운 절임채소만 있으면 된다. 적당한 크기로 썬 양배추를 마늘기름에 볶아 향을 내고 간장(폰즈소스도 좋다)으로 간한 다음, 고춧가루를 조금 뿌리면 완성되는 양배추 볶음은 따뜻한 반찬으로 아주 좋다. 작업실에는 늘 차가 있으므로 오차즈케도 만들 수 있다. 밥에 일본 증제녹차를 붓고 명란젓, 오징어젓갈을 곁들이거나 와사비향이 나는 후리가케를 조금 뿌리면 담백한 한 끼가 된다. 근처 빵집에서 사온 바게트의 속을 갈라 버터를 바르고 치즈와 햄을 넣어 간단 샌드위치도 만든다. 프랑스에서 점심식사로 늘 먹던 장봉뵈르(jambon beurre) 샌드위치-바게트를 반으로 잘라 버터와 햄을 넣은 것-는 서울의 점심으로는 왜이리 부실할까…. 늘 그 생각을 하면서.
반면, 절대로 식당에 가지 않고 작업실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 있다. 치즈를 듬뿍 잘라 넣고 화이트와인을 조금 넣어 끓인 다음 바게트와 감자를 찍어넣는 퐁듀다. 풍듀에는 내 첫 프랑스 체류지인 안시에서 보낸 겨울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안시는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며 알프스 자락 끝에 있어 겨울이 특히 아름답다. 안시의 대표메뉴가 지역에서 생산되는 르블로숑, 에멘탈, 콩테 치즈를 섞어 끓인 뒤 빵과 야채를 찍어 먹는 사부아식 퐁듀(fondue savoyarde)였다.
겨울은 퐁듀 팟과 워머를 꺼내는 시기다. 친구 몇과 단출한 모임을 계획하고 곧바로 떠올린 음식이 퐁듀였다. 보통은 몇 가지 음식을 테이크아웃해서 펼쳐놓고 먹고 마시고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위한 작은 식탁을 차리고 싶었다. 연희동 사러가마트에서 에멘탈, 그뤼에르 등 몇 가지 치즈와 빵, 감자 등을 샀다. 와인은 친구들이 준비할 터였다. 작업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벨기에산 경성치즈와 스모키 모차렐라도 꺼냈다. 화이트와인을 조금 붓고 네 종류의 치즈를 섞어 냄비에 넣고 끓인다. 빵도 깍둑썰기, 찐 감자도 깍둑썰기다.
뜨겁게 데운 냄비를 가운데 두고 모두 둘러앉아 먹는 음식에 나는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 ‘원플레이트 퀴진’은 혼자 먹는 한 접시의 음식이지만 ‘원팟 퀴진’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먹는 식사를 뜻한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어깨를 맞대고 뜨거운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 시간이 아닐까? 그 따뜻함이 나는 늘 간절하다.
치즈가 바글바글 녹아 서로 엉길 즈음, 퐁듀팟에 옮기고 손님들 앞에 내놓았다. 약간 어두운 조명과 촛불 속에 겨울이 깊어간다. 뜨거운 치즈와 차가운 와인. 이 정도의 요리라면 작업실에 잘 어울리지 않은가. 밤이 깊어가는 만큼 와인잔도 비어간다. 이야기가 길어져도 괜찮다. 치즈는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