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6
저장강박증자의 물건 버리기
작업실에 가끔 들르는 만화가 선현경 씨는 쌓여있는 물건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버리기로 작정했다. 스무 살이 된 딸이 어릴 적에 썼던 스푼부터 백만 년이 지나도 묵혀둘 것만 같은 옷가지(특히 양말)들을 꺼냈다. 버려도 버려도 물건은 끊임없이 나온다. 그녀의 책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는 버린 물건과 그에 얽힌 사연을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물건을 사들이고 정리하다가 버리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
최근 몇 년 동안 서점에는 버리지 못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과 텅 빈 공간에서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대로 소개되곤 했다. 나는, 저장강박증 환자의 넋두리와 소유를 거부하는 미니멀리스트의 환희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다. 나는 누군가가 떠나버린 동네와 폐허가 된 건물들, 무용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쓰곤 한다. 그런 내가 물건들이 싫증나고 불필요하다고 해서 쓰레기통에 던질 수 있을까? 한편, 나는 텅 빈 공간을 정말이지 좋아한다. 비어있기에 기억의 자락으로만 채울 수 있는 공간에서 전율을 느낀다. 특히, 빈 공간을 빈 채로 두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여백있는 공간이라고 자부했던 내 작업실이 더 이상 빈틈이라곤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업실이 미니멀했을 때는 벽과 바닥 공사를 끝낸 직후, 가구 두 개(미송 아일랜드와 자작나무 서가)만 달랑 놓여있던 그날뿐이었다. 지금 작업실은 책이 넘쳐 쏟아질 듯하고, 서랍은 종이들로 빽빽해서 열리지 않으며, 홍차통은 다 비운 만큼 새것이 채워져 결코 줄어들지 않는 데다, 잡동사니들이 창궐한다. 그러나, 잡동사니란 얼마나 귀여운가! 그야말로 삶에 활력을 주는 것들이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은 서류들, 원고 쓸 때 참고했던 자료들,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지만 웬지 꽂아두어야 마음이 편한 책들은 그렇다치고,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졌지만 그 물건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해서 계속 갖고 있던 물건들도 자리를 꽤 차지한다. 내가 이름을 붙여준 것들, 한때 내 마음에 와닿은 것들이다. 기억을 공유하는 물건들과 헤어지는 일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만큼 힘들다. 하지만 이런 물건들도 있다. 작업실에 방문하는 사람 중에 차를 선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도저히 못 마시겠는데, 너라면 잘 마실 것 같아서”라면서. 그리고 이런 경우들.
“저는 안 쓰는데,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필요할 것 같아서요.”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마켓 열 때 팔아서 수익 좀 내보면 어때?”
“이번에 나온 책이에요.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이거 누구 전해줄건데, 못 만났지 뭐야. 그 친구 오면 전해주게 여기 두고 가도 되지?”
이런 물건들은 내 사물과 뒤섞여 어느새 하나의 잡동사니가 된다. 출간기념회나 송년 모임 등 많은 인원이 들고난 후에는 어김없이 휴대전화 충전기, 털목도리, 우산 등이 쌓인다. 이럴 때 작업실은 월세 내는 유실물 보관소다.
때가 왔다. 몰아치듯 단행본 원고를 끝내고 돌아서니, 해가 바뀌었다. 새 원고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묵은 먼지처럼 쌓인 것들과 이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물건들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고, 삶도 공간도 가볍게 하고 싶어졌다. 그동안 물건을 버리려고 하다가 실패한 적이 많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도전은 쉽게 무너졌다. 뒤죽박죽이 된 서랍을 다시 정리하고 보니, 분명 버려야 할 것이 버젓이 보이는데도 휴지통으로 들어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 중에서 읽을 것과 버릴 것을 골라내다가 모두 도로 집어넣었다. 현기증이 났다.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온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도전! 이번에는 꼭 버려야 할 아이템을 정했다. 선현경 씨는 로고가 그려진 발목 양말부터 시작했으니, 나는 오래전 선물받고 여전히 뜯지도 않은 티백들을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몇 개를 휴지통에 넣었다. 어디선가 비명이 들리는 것 같지만 눈을 꼭 감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다음은 유리병과 유리용기들을 꺼냈다. 잼병이나 양초를 태우고 남은 유리병들, 화병으로 쓰려고 씻어둔 음료수병들, 어떻게든 써보려고 넣어둔 깨진 도자기 등을 꺼냈더니 탁자 위에 가득이다. 이런 빈 용기들 때문에 공간이 가득차 있었다니 약간 허탈해졌다. 꼭 필요한 몇 개만 남겨두고(!) 모두 재활용 박스에 담았다. 누군가의 선물이지만, 내 취향에 맞지 않아 꺼냈다 도로 넣어둔 접시와 그릇도 박스에 넣었다.
과연 마음의 상처를 덜 받으면서 물건을 버리는 방법이 있긴 한 모양이다. 사소한 물건들 때문에 욕망에 들끓던 시간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살면서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살아가면서 더 잘 알게 된다. 좀 더 버리기로 한다. 작업실이 텅 빌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