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강수미의 공론장 2
양극화의 미학, 미술경향의 문제
1965년 출간돼 프랑스 젊은 층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은 지금 여기 20~30대 독자가 읽어도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 젊은이가 국내 예술대학 과/또는 유학을 마친 미술, 건축, 디자인, 영화, 연극, 패션, 무용 전공자라면, 그래서 남보다 나은 아비투스를 취득했고 세련된 감각을 가졌다고 자처한다면 더 그럴 것이다. 특히 연남동, 서촌, 경리단길, 한남동 등 소위 ‘핫 플레이스’가 마치 자기 취향의 고향, 자기 라이프스타일의 최신 버전, 자신의 미적 커뮤니티 혹은 심적 게토로써 감각의 쾌적함과 심리적 안락함과 지적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현재 경제 형편, 경력, 지위를 볼 때 학생 때부터 갈고 닦은 자신의 미시전공/오타쿠적 지식과 아방가르드/앞서가는 안목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상을 못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녀에게 《사물들》은 씁쓸한 일기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상품사회가 제공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자신과 통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일할 수 있다면 “삶은 하나의 예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궁핍이 “그들의 현실이고”1 오늘 여기 88만원세대의 수입은 고사하고 신분조차 불투명한 젊은 예술인들의 현실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간극, 즉 사물에 대한 취향의 사적 정치경제학과 사물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부와 권력의 불일치, 예술적 삶을 향한 꿈의 질적 수준과 예술을 전유할 수 있는 물질적 역능 사이의 낙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고 깊어졌다. 그 간극은 사회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됐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배태한 극단적 양극화가 그 간극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간극, 또는 양극화는 특히 요즘 뜨는 감각과 훈련된 열정, 디지털미디어 기반의 다원적 정보력과 의사소통능력을 지닌(이런 능력은 큰 잠재력이지만 현실 자본이나 힘으로 교환되는 행운은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 청년세대에게 치명적 내상을 입히거나 강압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를테면 재능 면에서나 성실함에서나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자격을 갖췄다고 자신하는 그/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SNS를 보면 나보다 못한 이도 가진 욕망의 대상 획득에 번번이 실패한다. 그런 경우 그/녀는 점차 위축되고 자신과 세계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기에 이른다. 혹은 반대로 과도하게 외부에 개방된 채 무조건 승자나 강자를 따라 하고 보는 카피캣(copycat)이 된다. 나는 여기에 한국현대미술의 어떤 문제를 결부시킬 수 있다고 본다.
우선 한국의 젊은 미술가(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보면, 그 간극은 하부구조적 원인의 단계를 넘어서 문화적 표현의 꼭짓점까지 차올랐다. 이름 붙이자면 ‘미적 경향의 양극화’ 내지는 ‘양극화시대의 양극화된 미술 경향‘이다. 첫째로는 만든 이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사적으로 내밀한 부분에 연결되는, 내향적이고 스케일이 작으며 멜랑콜리한 미술이 있다. 또는 그런 속성을 대중문화 속 이른바 ‘병(신)맛’ 코드나 ‘비주류/비정상’ 기호로 덧씌워 자신과 같은 심리 및 처지에 있는 커뮤니티 안에서 증폭시키는 미술이 있다. 둘째로는 문화적 주도권이든 경제력이든 현실 사회에 강한 우세종의 미술, 대표적으로 테리 스미스가 컨템포러리 아트 유형으로 꼽은 리모더니즘(remodernism), 레트로 센세이셔널리즘(retro -sensationalism), 스펙터큘러리스트 아트(spectacularist art)2 중 하나를 부단히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재-재생산함으로써 그 일원이 되려는 미술이 있다(지난 글에서 청년작가들에게 전위적이거나 혁신적인 작품을 보유하고 있냐고 물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틈은 없지만 이 현대미술 유형은 대체로 과거의 유력 미술 유령들을 오늘의 글로벌미술시장에 맞게 재생한다. 기품 있으면서 섹시하고, 전통적이면서 센세이셔널 할 수 있게 ‘복고(retro-)’라는 위약과 ‘장관(spectacle)’이라는 강장제를 써서. 그러니 그것을 흉내 내는 새로운 세대의 미술은 낡은 미술 유령의 출몰을 뒷바라지하는 꼴이다.
어쨌든 위 첫 번째 미술은 젊은 미술가들이 사회경제구조가 초래한 양극화에 대해 무력한 소외 또는 자발적 잉여생산 및 소비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미술은 정반대로 그 양극화 또는 간극을 양성하고 고착화한 문화예술경제의 패권적 기제를 영리하게 마스터하고 점유, 활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주인미술(라캉의 ‘주인담론’에 유비하자면)로 거듭나고자 하는 양태다. 그런 면에서 이 두 미술의 방향은 분리된 노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미술계에는 가령 현재는 우세종 미술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 예외적 스타일이나 별스러운 취미라며 하루아침에 각광 받을 기회가 널려있다. 두 노선이 얼마든 뒤섞이고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미적 경향의 양극화’ 문제를 젊은 미술가들에 한정하지 않고 한국현대미술 전반이라는 큰 틀에 맞추면 무엇이 보이는가? 막대한 물량 공세로만 구현 가능한 스펙터클 미술 기획안, 시쳇말로 ‘몰빵’에 가까운 ‘선택과 집중’ 정책을 통해 발탁한 스타 아티스트, 그/녀에게만 몰리는 재정 지원과 미술제도적 후원, 그런 거대 자본과 시스템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문화예술지식 및 현장 경력에 독점적 지위 부여, 그것을 우월하고 유효한 것으로 가공해줄 수 있는 미술계 내부 전문가의 영향력 행사. 이렇게 다양한 성부(聲部)의 여러 박자가 긴밀하게 울려 퍼지면서 한국 미술계의 소위 ‘상위 1%(객관적 통계가 없으니 양극화를 표상하는 사회적 수치를 빌리면) 컨템포러리 아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보인다. 이는 짧게는 최근 몇 년, 길게는 10여 년 사이에 만들어진 현상이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 리움, 에르메스코리아, 양현재단, 일우재단, 국제갤러리, 갤러리 현대, 아라리오, SBS, CJ, 현대자동차, 하이트 등을 통해 이뤄진 각종 미술사업, 즉 전시, 컬렉션, 상, 오디션, 국제교류, 작품 위촉, 출판, 국제비엔날레와 레지던시, 국제미술시장에서의 판매, 경매, 프로모션, 협업 사례에 등재된 소수의 작가/심사자/결정권자 이름과 그들의 작품/프로젝트를 검토하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 이름들과 사업들이 한국현대미술의 우세종이다.
그런데 위의 장면과는 반대로 보이는, 그러나 분명 동시대의 조건 속에서 동시대미술의 일부로 공존하는 미술 종(種)이 있다. 의식적으로 넝마주이의 질료와 방식을 써서 약함, 부적응, 결여, 궁핍, 불완전, 불안정, 버려짐을 드러내고 그렇게 해서 소수자적 감수성과 삶의 방식에 어필하는 작업이 그에 속한다. 가까운 과거에는 철 지났거나 폐허로 취급됐을 장소를 서로 알음알음 협력해 주변부 예술공간으로 변용하고 운영하면서 기업의 자본이나 공적 제도의 지원 대신 자생력과 문화예술 힙스터의 지지를 양분 삼아 커가는 미술 시스템도 있다. 그리고 뻔한 예가 되겠지만,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술가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합당한 자리도 없이 각자의 현존으로 각자의 미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화실에 고독하게 앉아 40년째 사군자를 연마하는 이서부터 공동체에 기여하는 미술을 실천하고 싶어 자비를 들여 강화도 섬 주민들의 미적 일상을 신문으로 만드는 이까지 말이다. 이들은 싫든 좋든 한국의 상위 1% 현대미술과는 현재로서는 다른 지점에 있다. 아니, 사실은 사회에서 말하듯 그 1%를 떠받치고 있는 99%의 나머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도 어떻든 충분치 않은 사회적 인정과 경제 형편에 고통 받고, 스타 아티스트의 휘황찬란한 행보와 작품 앞에서 쪼그라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를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앞서 말한 젊은 미술가들의 현실과 어려움은 특정 세대가 아니라 대다수 미술인이 겪고 있는 현실이고 문제다. 문제는 가진 기성세대와 못 가진 청년세대, 의식과 취향이 ‘꼰대’인 이들과 그에 앞서가는 이들의 미학적 갈등이 아니다. 조건 설정에 따라 그것들은 얼마든 바뀌고 뒤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기형적으로 양극화된 미적 경향을 문화 경쟁력을 빌미로 내속시키는 미술계 상하부구조다. ‘세계적 미술관’ ‘국제적 지명도의 작가’ ‘글로벌 전시’ ‘명품’ ‘저명 전문가’ 같은 둔한 수사학 뒤에서 다수의 다종다양한 미술가능성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든 꿈에서 깨 짚어야 한다.
강수미 동덕여대 교수
1 Georges Perec, 《Les Choses: Une histoire années soixante》, 1965, 조르주 페렉, 김명숙 역, 《사물들》,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pp.20~23.
2 Terry Smith, 《What is Contemporary Ar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pp.267~268.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