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나전칠기의 귀환 – 고품격의 섬세한 손맛이 그리운 이들에게
옛날 할머니가, 혹은 시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자개장롱이 기억나시는지? 1960~1970년대 중산층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싶어 했던 혼수품 제1 순위가 바로 자개장롱이었다. 자개란 전복, 혹은 조개껍데기를 얇게 자른 조각으로, 자개로 장식한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예부터 실생활에 애용되던 값비싼 전통공예품이다. 그러나 아파트 중심의 현대적 주거문화의 확산과 기능주의적인 서구 모던 디자인 양식이 유행하면서, 장식적이고 덩치만 큰 할머니들의 향수어린 자개장롱은 구식으로 치부되어 내버려지거나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최근 오랜 기간 잊혔던 칠기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새롭게 우리 문화계에 화려한 귀환 행진을 벌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얼마 전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 여사는 동대문시장에서 나전장식 머리핀을 구매하여 한국 나전칠기의 문화적 명성을 드높였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전시관에서 열린 특별전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에서도 나전칠기에 대한 국제 디자인계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2011년 서울모터쇼에서 BMW가 선보인 명품 자동차 <나전칠기 BMW 750Li>는 차량의 내장재를 한국 나전칠기 장인과 협업하여 만든 것으로서 주목받았다. 이와 같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전통 나전칠기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어떨까? 아직까지 구식 자개장롱으로만 나전칠기를 기억한다면 그대야말로 모더니티 미술 디자인 양식에 매달려 있는 21세기의 구식 인간이다.
나전칠기의 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나,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독특한 나전칠기를 제작했다. 그중에서도 고려시대의 나전칠기가 가장 고품격의 손맛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전 세계를 통틀어 20여 점에 불과한데, 대부분 외국에 있다. 고려 나전칠기에 대한 관심이 대중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천년을 이어온 빛 – 나전칠기> 특별전을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 나전 장식 공예품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현재 고려시대 나전칠기가 국내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외국,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여러 점의 고려 나전칠기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최근 국외 소장 한국 문화재 환수운동에서 고려 나전칠기 환수 문제가 논의된 것은 당연했다. 올해 봄, 드디어 이러한 관심들이 결실을 보았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고려 나전경함(螺鈿經函) 한 점이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번에 기증된 나전경함은 고려말 대장경 간행 때 함께 제작한 불교 경전 보관용 상자로서 전 세계에 9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옻칠한 상자의 표면에 모란당초문과 연주문 등의 섬세한 문양을 새긴 나전 조각 2만 5000여개를 붙여서 장식한 이 나전경함은 고려시대 장인의 고품격 손맛과 마음이 모아져서 완성된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고려 미술품의 정수이다. 이 나전경함의 귀환으로 인하여,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국립박물관에서 고려 나전칠기의 실물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려 나전칠기에 버금가는 명품을 제작하려는 현대적 노력은 2001년 미국 뉴욕의 소호에 세워졌던 비움(Vium)과 같은 디자인 기업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비움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전통 나전칠기 장인들과 현대 디자이너들의 협업은 현재진형형으로 여러 장인과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으며, 그 결과 전통적인 수공예 기법과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 조화된 현대 한국 나전칠기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호평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나전칠기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올해 봄에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빛의 예술 나전칠기전>을 열어 조선시대 왕실의 명품 나전칠기들을 소개했다. 이번 여름 부산 근대역사관에서는 <근대 나전칠기 공예전>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우리나라 전통 나전칠기들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들에서 소개된 옛 나전칠기 유물들은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나전 장식과 검은색 혹은 붉은색의 칠 바탕이 만나서 창출해낸 현란하면서도 아름답고 우아한 한국적 미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간결하고 기능적인 미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들은 최근 귀환한 나전칠기의 국제적 명성을 통해서 섬세함과 느림과 정성이라는 한국 전통 장인들의 손맛이 깃든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고품격의 손맛을 간직한 나전칠기의 화려한 전통적 아름다움을 할머니의 자개장롱 추억과 함께 곱씹으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대문화와 미적 감수성에 접목시켜 재탄생시키는 일에 다같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주경미·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