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리얼리즘의 한국적 버전은 가능한가?
1974년 <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를 시작으로 한국 극사실 화의 태동과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해 온 고영훈의 개인전을 계기로 ‘한국 리얼리즘의 장르와 양식 규정의 가능성 모색을 위한 콜로키움’이 지난 5월 31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다. 건강한 미술생태계 조성과 현대미술 전개에 필수적인 비평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한편,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로 성장해 온 형상미술의 계보와 유파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인 리얼리즘의 맥락에서 고찰하기 위해 마련된 토론회다. 평론가 6인(김복영, 김영호, 김영순, 정연심, 정은영, 김성호)과 화가 17인(한만영, 이석주, 주태석, 김강용, 고영훈, 황순일, 김영성, 이원희, 정보영, 김남표, 두민, 권경엽, 강세경, 마리킴 등)을 논객으로 30여 명의 미술인이 머리를 맞대었다. 이 콜로키움은 ‘한국 리얼리즘’이라는 주제를 내세운 난상토론회라는 점 외에도 극사실회화의 주역들과 이론가들이 함께 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듯 예술의 영역에서 리얼리즘이란 ‘객관적 현실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재현·묘사하려는 태도와 창작방식’을 말한다.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은 ‘리얼리티’의 개념과 그 표상방식을 둘러싼 담론을 거치며 전개되어왔다. 논쟁의 중심에는 실재(real), 존재(being), 사실(fact), 진실(truth), 본질(essence), 현실(actuality)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혼재하며 근대 미학과 예술학의 발전과 더불어 의미가 재규정되면서 복잡성은 가중되었다. 미술의 경우 19세기 프랑스의 리얼리즘 사조가 시대와 현실을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출현한 이래, 사회주의 리얼리즘, 쉬르레알리즘, 누보레알리즘, 하이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 네오리얼리즘 따위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변태와 분화를 계속해 왔다. 최근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와 시뮬라시옹 개념에서 제기되는 실재와 이미지 해석 방식은 리얼리즘 미술의 생태계를 전과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고 있다. 이렇듯 예술의 본성이 변화하는 현실과 존재에 대한 성찰인 이상 리얼리즘의 진화가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주제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리얼리즘 논의는 (신)형상미술의 출현과 맥락을 같이한다.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미술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이후 국내 화단에서 새로운 형상성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1980년을 전후해 형상미술이 하나의 경향으로 정착한 이래 한국 리얼리즘 미술은 다양한 갈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상성의 발현 현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리얼리즘은 독자적인 양식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지 못한 채 섹트주의(sectarianism)의 울타리에 가두어졌거나 서구 특정양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다. 한국의 형상미술이 민중미술이나 극사실회화처럼 이제 국제화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환경적 요인을 고려한다면 한국 리얼리즘의 특수성과 양식적 규정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닐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전개되면서 미술에서 계파와 그룹이 사라지고 개별적 경향들이 부각되는 현실에서 한국 리얼리즘의 현주소를 가늠할 계보를 세우는 일은 가능할까. 또한 미술시장과 미술관의 권력이 미술현장의 경향성과 대중의 미의식을 지배하는 왜곡된 현실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양식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번 콜로키움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고 있다. 리얼리즘 포럼이 지속가능한 행사로서 담론 형성의 길잡이가 되기를 희망하며 주최 측은 한국 리얼리즘의 모색과정을 네 마디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잠정결론을 내렸다. 첫째. 한국 리얼리즘에 대한 양식적 규정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둘째. 한국 리얼리즘의 경향성을 지니는 작가군을 조사한다. 셋째. 한국의 리얼리즘 작품을 양식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논리적 틀을 모색한다. 넷째. 대규모의 기획전 <한국 리얼리즘전>을 개최해 담론을 전시로 구현한다. 이상의 네 마디가 하나의 프로젝트가 될 것이며 첫째 마디에 해당하는 이번 행사에서 드러난 작가와 비평가들의 관심은 차기 행사에 대한 타당성을 제시해주었다.
‘한국 리얼리즘(Korean Realism)’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현상으로써 인정되어 온 다양한 리얼리즘의 계파들을 섹트주의를 넘어 장르현상으로 설정하기 위한 논리개발을 시도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 리얼리즘의 세계화를 위해 포괄적 외연을 갖추는 가운데 전개되어야 하는 사업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리얼리즘의 전통적 맥락과 현대적 계승이 모색되어야 하며 단순히 외면적인 것을 넘어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묘사하기 위한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엥겔스의 주장처럼 ‘리얼리즘이란 세부적인 묘사의 진실성 이외에 전형적인 환경에서 전형적인 성격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므로.
김영호·중앙대 교수
위.고영훈 <이것은 돌입니다 7411> 캔버스에 유채190×400cm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