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이라고?
미술계의 국외자인,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인 사람이 미술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즉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지드래곤 현대미술 전시회-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전>이라면 좀 다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은 특정한 ‘계’를 넘어 사회 성원들의 보편적 문제가 된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자격이 없다. 그가 대중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추면 그만이다. 자격은 다른 공간에서 한 전시들과 그에 대한 비평과 관객의 평가를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할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자격은 커녕 아무런 이력조차 없다. 이력을 쌓고 자격을 갖추는 데 일정한 시간이 수반되는 건 물론이다. 현재 같은 미술관 1층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윤석남 작가가 미술가로서 경과한 시간은 괜한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는 김홍희 관장 자신의 미술관 운영 원칙, 적지 않은 진지한 사람이 그를 지지한 이유이기도 한 운영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김홍희 관장은 2012년 초 관장에 취임하며 “앞으로 외부기획사에 의존한 대형블록버스터 전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에선 이번 전시가 외부 기획이 아니라 ‘공동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이 전시는 공간 대관에 ‘공동기획’이라는 명의까지 패키지로 판매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외부 기획이다. 소속사 YG는 지드래곤의 홍보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 전시를 기획했고 서울시립미술관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몇 곳을 접촉했다. ‘뜻밖에도’ YG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공간과 권위를 패키지로 대관할 수 있었다. 공동기획이니 괜찮은 게 아니라 공동기획이어서 문제인 것이다.
데이빗 보위를 사례로 들기도 하는 모양인데, 진심이라면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13년 이른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디자인 뮤지엄 런던 빅토리아&알버트(V&A)가 ‘데이빗 보위 이즈’라는 전시를 연 건 보위에게 그럴 자격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보위는 대중연예인 혹은 뮤지션이라는 타이틀로 규정할 수 없는 존경받는 아티스트다. 그가 선도한 글램록이 패션, 무대예술, 디자인 등에 미친 영향은 예술사적 차원이다. 여전히 현역인 보위가 가사는 물론 사운드에까지 제 철학과 미학을 불어넣어 카운터컬처의 기수로 공인된 건 이미 54년 전이다. 그런 사람을 상업적 기획사에 의해 픽업되고 길러진 20대 아이돌 가수와 비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물론 보위의 전시는 보위 소속사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김홍희 관장은 이번 전시를 ‘포스트 뮤지엄’ 의 개념으로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뮤지엄은 계몽이나 교육을 기조로 한 근대적 미술관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국에서 불었던 포스트모던 바람에 대해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던 바람은 1980년대 변혁운동의 경직된 정신세계(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예술에서 예술을 소멸하기도 한)와 결부되어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있는 화두를 선사했다. 그러나 결국 포스트모던 바람이 남긴 건 살아숨쉬는 진리(들)가 아니라, 누구도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 지적 괴멸이었다. 괴멸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길을 터주고 온 사회성원의 정신과 신체를 열어젖히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김홍희 관장은 그런 과정을 생뚱맞을 만큼 뒤늦게 공공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명화 감상 겸 가족 나들이 공간’을 ‘기업 홍보관’으로 바꾸는 게 과연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인가.
나는 이 전시를 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볼 필요 역시 느끼지 않았다. 나는, 혹은 지금 우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 즉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지 이 전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본 지인이 ‘생각보다 감각 있어 보이더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세월이 지나 지드래곤이 아이돌의 굴레를 벗고 데이빗 보위처럼 고유한 예술세계를 이룬 존경받는 아티스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드래곤은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다.
김규항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