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청춘미술 불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런데 우리 미술계는 지난 10년 동안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정체됐다. 특히 젊은 세대의 창작활동 성과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 나는 당사자인 젊은 세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에선 진지한 역사인식이나 치열한 창작태도를 감지할 수 없다. 그러니 유의미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도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근현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관심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사정이 이러니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둘째 치고, 분단현실 극복과 통일에 대한 의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은 “기성세대와 세상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항변하거나, “당장 코앞에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한데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문제가 우리와 뭔 상관이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들은 ‘청년’이라 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한 이유 있는 불만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분노도 없고 전투적으로 저항 할 줄도 모르는 나약한 ‘청춘’일 뿐이다. 낭만에 취한 청춘의 시절은 한 순간 명멸하는 불꽃놀이 같다. 반면 시대와 예술을 고민하는 청년의 정신은 영원하다. 가볍디가볍고 얇을 대로 얇은 청춘 말고, 조금이라도 묵직하고 두터운 ‘오늘의 청년미술’을 보고 싶다. 이것 말고도 불만이 많지만 이번호 기사에서 발췌한 아래 3인의 글로 위안을 삼는다.

“청년 세대의 감성에 맞는 감각적인 전시와 특정 집단의 취향이(의도했든/의도치 않았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불편함을 표출하는 주된 이유다. 이런 우려를 종식시키는 것은 이들이 생산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이 기존미술계에 얼마나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성 제도에 편입하기 힘든 젊은 작가들의 생존 실험인 신생공간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귀결되지는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새로운 플랫폼과 운영방식이 (일시적이나마) 신선한 탈주 가능성을 낳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진입 수단을 만드는데 그칠 것인지. 한 가지 희망사항은 운영 주체의 자립과 발언 외에 보는 주체의 권리도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문혜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변천>

“유행이나 대세와는 상관없이 창작을 하고, 현대미술 우세종의 맥락과는 다른 경로로 미술을 보며, 시대착오적이더라도, 흥행하는 장소와 시간에 부응하는 활동은 아니더라도, 오롯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장(場)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10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공기처럼 흡입하며 성장한 디지털 웹과 앱 기반 미디어 환경속의 감각지각을 새로운 가시성/표피의 작품들로 보여준다(일민미술관의 <뉴 스킨>).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름 없는 당인과 이름이 있더라도 예술가 주체를 주장할 수는 없었던 이들이 면면히 쌓아올리고 정교히 한 한국문화예술의 전통을 역사의 무게를 딛고 전개시킨다(삼성미술관 리움의 <세밀가귀>). ‘좋은 미술계’라는 것이 가능하고 또 유의미하다면, 이와 같은 예술 실천이 억압 없이 다양화하는 곳이다.”
– 강수미 <세대 특정적 미술? 오늘의 미술>

“선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속에서 선무의 존재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의 비극은 그 자신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그가 그 아픔을 형상화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지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광복 70년’은 단순히 해방 이후 시간의 총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과거의 질곡을 극복하고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을 전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김동일 <당대적 존재로서의 선무, 혹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것을 드러내기>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