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VIEW
‘쓸모’가 없으니 나가 주시겠습니까?
부산의 대안공간 오픈스페이스 배가 있던 산기슭이 곧 아파트 단지로 조성될 예정이란다. 가까운 지인들과 배의 마지막을 지켜본다는 생각으로 방문했다. 수십 년, 이곳에서 자라 울창함을 과시하던 나무들은 짧은 시간동안 몇 대의 포크레인과 불도저로 간단히 뽑히고 파쇄되어 쌓여 또 다른 산을 일구고 있었다. 덕분에 배에서 바다가 보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무동과 전시동 맞은편에 펼쳐졌던 수백 그루 배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언덕은 깎여서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의 절반 이상이 보일 정도였다. 파헤쳐진 산은 마치 수술대 위 개복(開腹)당한 환자가 내장을 드러내듯 뻘건 흙과 바위 덩어리를 노출하고 있었다.
몇 해 전, 수용과 개발을 알리는 빨간 깃발이 꽂힐 때부터 이곳의 소멸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만큼 불안감도 커졌지만 그것은 남의 일인양 작가는 전시를 열었고, 작업을 했으며, 이곳의 스태프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전시 오픈 후 뒷풀이의 왁자지껄함도, 초여름 전, 몇일 간만 핀다는 배꽃을 봤던 한량놀이도 이제 다 추억이 되어버렸다. 따뜻한 볕을 받으며 전날 술자리에서 침을 튀기며 한 많은 이야기의 복기(?)를 위한 티타임도 함께. 이런 시시콜콜한 추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쉽지만 뭔가 굴복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입맛이 쓰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돈의 입장에서는 ‘그깟’ 레지던시 공간이나 전시장 하나보다 번듯한 아파트 하나를 세우는 것이 더 모양새 있을 것이다. 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며, 그것이 세상을 위해 더 쓸모있는 일이겠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몸집을 더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이 돈의 눈에는 생떼를 부리는, 이른바 ‘알박기’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예술은 쓸모로 부터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거리’, 아주 적은 그 거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라 하는, 사람의 끝을 알 수 없는 욕심이 폐허 같은 이곳의 풍경처럼 섬뜩하다.
황석권 anarchy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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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
지난해 ‘여성 혐오’ 문제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여성 혐오 자체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자신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슈로 제기되었다. 이에 반발하는 ‘여혐혐(여성 혐오에 대한 혐오)’ 문제를 넘어 최근에는 여성들에 의한 ‘남성 혐오’ 현상이 한창이다. ‘메갈리아(‘메르스(MERS)’와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정반대인 세계를 다룬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합성어로 여성전용 커뮤니티를 말한다)’ 유저들이 여성 혐오 표현을 남성에게 되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치녀’라는 용어는 ‘김치남’으로, ‘삼일한(여성은 삼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에 맞서 숨쉴한(남성은 숨 쉴 때마다 한 번씩 맞아야 한다)으로 받아치는 것이다.
거울로 비추는 듯이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 일명 ‘미러링(mirroring)’으로 불리는 이들의 전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하는 탈리오 법칙의 현재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방식은 여성 혐오 근절을 위한 전략적인 패러디로 메갈리아의 활동은 한국 페미니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건전하지 못한 언어 사용과 성적 비하 발언 때문에 단순한 남성 혐오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다. 결국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갈등과 자극적인 내용이 증폭되어 거울과 거울이 마주하게 되면 그 끝은 무한대일뿐더러 인간에 대한 혐오감만 남게 된다. 거울이라는 반사경은 반복될수록 비추는 대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일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에 남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을 결정했고 이에 북한은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그리고 남한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지난 설날 연휴 때부터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고 보면 현재 남북의 대응 역시 ‘미러링’ 방식과 닮아 보인다. 게다가 매번 계속되는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 남북 대결과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면서 남한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대북 의식이 과거의 ‘반북’을 넘어 ‘염북’, ‘혐북’으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혐오의 시대에 탈출구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슬비 drizzles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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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마감이 한참이던 지난 2월 24일 광화문 북쪽 광장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요구하는 유령들의 아우성이 퍼졌다.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는 가로 10m, 세로 3m 크기의 투명 스크린을 세우고 홀로그램 영상을 비춰 시위를 진행했다. 오랜만에 서울의 심장부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시위의 목적보다 홀로그램을 활용한 시위라는 점과 서울시로부터 집회가 아닌 문화제 개최로 허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어떤 대응을 보일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홀로그램 시위는 2015년 4월 1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시민 운동단체인 ‘홀로그램 포 프리덤’이 스페인 정부가 ‘공공시설 인근 시위금지법’을 사실상 통과 시킨 것에 항의하기 위해 처음 열린 후 이번이 두 번째다.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의 한국지부에서 주최한 이번 시위에 참여한 120여명은 사전에 각자 제작한 피켓을 들고 “평화시위 보장하라” “집회는 인권이다” 등의 구호를 제창하며 행진하는 모습을 크로마키 촬영했다. 홀로그램 시위는 다수의 군중이 밀집해 물리적 광장을 점유하는 일반적인 시위와 달리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가상현실 속 시위대가 목소리를 내기 힘든 현실의 누군가를 대변한다. 엠네스티 한국지부 관계자는 “가상공간의 시위에 경찰이 제재를 가한다면 이는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퇴행적 행보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시위와 경찰의 대치는 분리할 수 없는 두 현실의 공존 가능성을 시사한다. 같은 시간, 두 공간 속 목소리가 합쳐졌다 흩어지는 모습은 분명 변화된 공간인식 태도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시위가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창작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오늘, 이러한 시도는 “집회시위의 자유”와 더불어 시위 자체의 “표현의 자유”도 함께 외치고 있다. 한동안 ‘검열’은 미술에서도 이슈였다. 그리고 미술의 검열에 대항하는 미술은 어떤 표현방식을 취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볼 만하다.
임승현 shlim98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