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 타이페이 비엔날레 2014 총감독 니콜라 부리요
“관계항을 확장시켜라”
1990년대 니콜라 부리요가 현대미술 비평서《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을 출간했다. ‘관계의 미학’은 1990년대 미술에서 나타난 새로운 시도들을 예리한 관점에서 바라본 시기적절한 비평적 키워드라는 평가를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될 수 없는 현대미술의 작가군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의 제안이었다. 현재 매우 영향력 있는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크릿 티라바니자, 리암 길릭, 피에르 위그,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은 《관계의 미학》에서 언급된 후 미술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반면에 니콜라 부리요가 제시한 비평이론에서 ‘인간 상호관계(inter-human relationship)’ ‘참여미술(participatory art)’등의 특징을 호출한 몇몇 이론가들은 날선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된 이 현장비평 이론은 현재까지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니콜라 부리요는 이후 계속되는 전시(<플레이리스트>(2004, 팔레 드 도쿄), <2009 테이트 트리엔날레>(2009, 테이트 모던)와 이를 근간으로 한 비평서 (《포스트프로덕션)》(2002),《 레디컨트》(2009)) 출간을 통해 개념을 발전 및 확장시키면서 새로운 모색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이 감독한 타이베이 비엔날레 2014에서 새로운 개념인 ‘Exform’을 제시해 재주목 받고 있다. 《월간미술》은 지난 10월 13일 삼성미술관 리움개관 10주년 강의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나 지금까지 제시한 일련의 개념과 최근 전시에서 제시한 새로운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관계의 미학》이 출간된지 어느덧 약 20년이 흘렀다. 당대의 미술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제시했던 ‘관계의 미학’이 오늘의 미술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가. 세월이 흘러도 의미는 같다고 본다. 사실 이는 《 관계의 미학》에 주로 등장하는 1960년대 출생 작가들의 삶의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관념이 사라지고 동네슈퍼가 아닌 대형마트가 출현하는 새로운 시각환경의 산업사회구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다. 이들은 1990년대 서비스 중심 사회로 접어 들었을 때 인간상호 관계만이 완전히 상업화, 상품화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영역이라 생각했다. 당시의 작가들은 이 점을 매우 정확히 꿰뚫었고 이 상업화 경향에 대해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은 미술에서 만큼은 시장과 거리가 먼 새로운 형태를 만들려고 애썼다. 결국 ‘관계의 미학’의 의미는 같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외려 확장되었다. 내가 《 관계의 미학》을 저술한 1998년만 해도 스마트폰, SNS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터넷도 지금처럼 확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기계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시 <교감>은 ‘관계의 미학’에 기반을 두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전시에 일명 ‘관계의 미학 작가들’(리크릿 티라바니자, 리암 길릭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전시가 ‘관객 참여’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인상도 든다. 사실 관계의 미학이 참여미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관계의 미학’을 처음 제시한 큐레이터로서 이번 전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 <교감전>의 핵심은 ‘대화(dialogue)’인 것 같다.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대화 말이다. 특히 바이런 킴의 청자 유약색 회화와 고려청자,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고려불화가 함께 놓인 구성은 전시의도가 잘 살아난 큐레이팅이라 본다. 반면 리크릿 티라바니자와 리암 길릭 등의 작품이 있는 기획전시실과 로비의 전시는 비교적‘관계의 미학’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하지만 ‘참여’는 ‘관계의 미학’의 일부일 수 있지만 결코 필수적인 개념은 아니다. 내가 관계(relational)라고 말한 것은 예술에서 이론적, 형태론적으로 인간상호 관계(inter-human relationship)의 장을 여는 시작점을 뜻했다. 이는 일종의 ‘생산의 형태’다. 예술가는 어떤 구조를 통한 사회적 만남을 만든다. 특별한 방법과 미학적 의미에서 ‘관계’는 전시 자체의 관객 참여 여부보다는 전시 이전, 중간,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열린‘장’이다. 그러므로 훨씬 포괄적인 의미이다.
전시감독을 맡은 타이베이 비엔날레 2014 는, 당신이 기존에 제시한 인류 상호(inter-humanity) 관계의 범위가 확장된 듯 보인다.
타이베이 비엔날레 2014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상에는 인간보다 로봇의 개체수가 더 많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생태학적 알고리즘과 로봇의 관계는 충분히 이야기될 만하다. 기계와의 대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러한 기계의 알고리즘에 ‘관계’가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계의 미학’의 원본적인 개념을 우리의 새로운 세계에 좀 더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보고 다가가려고 했다.
타이베이 비엔날레 2014에서 선보인 개념을 Exform이라는 용어를 앞세워 곧 책으로 출간한다고 들었다.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 없는 불가해성을 이야기하며 모더니즘 안에서 대안을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제시하는 개념 Exform을 대안적 모더니즘(얼터모던)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시는 알터모던을 포함한다. 모든 전시는 그다음 전시를 수반하는데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9년 기획한 테이트 트리엔날레의 연장선에 있다. 물론 다음 전시를 준비하면서 되돌아보면 내가 이전 전시를 준비하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전시들의 어떤 연결성말이다. Exform의 영향을 준 인류세(Anthropocene)는 훨씬 폭넓은 개념이다. 이는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준다. 전체성과의 관계 말이다. 알터모던(Alter-modern)이 ‘문화적 재평가와의 관계’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규모나 범주에서 알터모던과 다르다.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설명 부탁한다. 인류세(Anthropocene)란 1980년대에 대두된 과학용어다. 즉 후기빙하기 시작 이후 약 1만 년간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생물권에 영향을 미쳐온 시간의 발생을 말한다. 인류가 세계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인데 이 개념에는 자명한 모순이 있다. 우리의 변화가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삶에서는 우리를 해치고 있고 개인의 무력감은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화된 경제시스템에 직면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프라스트럭처의 희생자이자 방관자가 되고 있다. 우리는 개인 혹은 시민과 종속계급 사이의 전례없는 정치적 연합이 출현하는 시대의 목격자들인 셈이다. 기계 산업 시스템은 시민사회와 확연히 분리된 구조다.
결국 과학용어인 인류세(Anthropocene)의 개념을 철학용어인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서 논의를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은 철학적 동향으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완전한 평등을 말한다. 그리스철학에서부터 데카르트의 ‘코기토 아고숨’까지 인간의 사고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인간중심주의)는 서양철학의 오랜 개념이다. 즉 인간이 경험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사변적 실재론은 객체를 넘어서는 인간의 사고 우위를 비판한다. 사변적 실재론의 대표적 학자인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 oriented philosophy)’이나 레비 브리언트의 《 The Democracy of Objects》에서 이들은 형이상학적 자율성을 부여해 의식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객체를 시도한다. 다른 요소들 간에 계급이 없는 존재론(flat ontology)을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적 의미로서 사변적 실재론을 해석하자면, 이는 pre-marxist의 상황이다. 내 생각에 그 배경은 자본주의의 논리적 결말로도 분석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은 객체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물질/객체(object)고 거기에는 어떤 인식도 없고 각 물질/객체 간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뒤섞임의 장을 연다. 결국 사변적 실재론이 제안하는 존재론은 Exform의 새로운 예시가 되고 이는 현대미술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다. 모든 객체가 같이 놓일 때(flat ontology) 오직 예술만이 예외적인 상황을 즐길 수 있기에 객체는 예술 속에서 변주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는 관계의 미학의 이론적 내용과 사변적 실재론 사이의 대화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의 미학은 미학화한 정치, 정치적 미학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술을 읽는 방법 및 시각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어떤 의미인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알랭 바디우가 철학에 대해 설명하며 “세계는 철학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사고의 방식으로서 스스로 변화한다”라고 한 말을 깊이 생각한다. 예술은 예술 내부의 변화로서 세계를 바꾼다. 어떤 정치적인 콘텐츠나 발언보다 예술 스스로의 변화가 더 정치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들은 예술을 정치적으로 생산해낼 수고 혹은 작품에 정치적 해설을 부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페이 비엔날레2014에서 정치적이란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말한 인류세(Anthropocene)의 명백한 역설은 상기시키는 바가 크다. 즉 자연, 기계, 인간 간의 역할과 관계 맺기가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관계는 정치적인 것의 메타포다.
‘예술이 보다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일종의 ‘정치적 선언서’ 역할을 해야한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술작품은 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한 시민으로서의 입장과 생산자로서의 예술가가 취하는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작가가 정치적인 내용을 포함한다고 그 인물 자체가 진보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정치색과 작품 속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은 일치되지 않고 혼동되고 섞일 수 있다.
글로벌한 이슈를 다룬다. 동일한 개념을 다른 지역에서 전시한다면 그 의미와 표현이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을까. 우선 이번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의 주제는 대만의 상황에서 고안했다. 현재 대만은 동서양의 대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 즉 에고(ego)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철학적 근간과 그 외의 다양한 시각적 측면을 다루는 수많은 타래의 동양철학 사이 어디에도 발을 내디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역성은 전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비엔날레의 특성상 지역 작가들의 전시참여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동안 많은 비엔날레를 진행해왔다. 당신의 전시기획 방식이 궁금하다. 또한 아직까지 비엔날레가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어떤 전시도 구상의 시작점은 이미지로부터 나온다.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아이디어의 언어들을 생각해낸다. 그 후 이들을 건설할 나의 시각을 구축한다. 사실 내가 구상한 대로 정확히 되지는 않는다. 마치 영화를 찍을 때 구상을 하고 크랭크인을 하더라도 촬영을 하면서 여러 요인에 의해 시나리오가 중간 중간 변경되는 것과 같다. 현실적인 예산, 지역, 상황 등 현실적 문제와의 싸움에 끊임없이 봉착한다. 나 역시 비엔날레가 가진 특정한 의미에 대한 인식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비엔날레가 열린다. 전시는 단순히 같은 장소에서 작품을 나열하기보다 그 속에 많은 지적인 주장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장소의 우연성에 기댄 전시를 이끄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대안적 비엔날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임승현 기자
니콜라 부리요는 196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큐레이터이자 평론가,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제롬 상과 함께 팔레 드 도쿄의 공동 창립자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공동 디렉터를 역임했다. 1990년부터 베니스비엔날레, 리옹비엔날레 테이트 트리엔날레 등 다수의 비엔날레 감독을 맡았으며 최근에는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 의 감독을 맡았다. 현재 파리 국립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의 디렉터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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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관계’의 장을 여는 작가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작품을 통한 메시지의 강요를 원하지 않는다”
‘팟타이’작업으로 크게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작업을 하면서 부담감은 없었는가.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고 나서 그에 대한 짐을 갖지 않는다. 수많은 명작을 남긴 피카소가 어떤 작품을 끝내고 난 후 부담감을 가졌겠는가. 내 작업들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는 작업을 보여주고 싶다. ‘팟타이’작업을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만들어 작은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넓은 생각을 펼치게 하고 싶다.
팟타이를 만들어 나눠 먹고, 티셔츠를 제작해 거리로 나가는 등 기존 미술관의 전시 틀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식으로 전시를 이어왔다. 화이트큐브 전시와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가.
매체보다는 소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나의 작업 소재는 ‘삶’과 ‘삶 속의 시공간’이다. 전시와 작업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예술적 경험이란 ‘무엇이 예술이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인지 ‘무엇을 만들고 보여주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당신 작업은 끊임없이 유동(flux)하는 것 같다.
내 작업은 변화하고 부유한다. 사실 예술은 상품화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술을 특정 장소에 두고 소장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예술이 분명 존재한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무한히 확장가능하지 않은가.
‘관계의 미학’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정치적 유토피아를 나이브하게 펼친다는 비판적인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모두는 사람들이 삶을 이해하도록, 그래서 더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그 방법은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유란 무엇인지를 교육학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서구적인 헤게모니다. 나는 동양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모든 것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난다. 스스로 내린 결정은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결국 정치적 자각은 내부에서 일어난다. 차를 나눠 마시며 그 차가 시작된 식물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정치적인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인 것은 특정 그룹의 의견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어야 한다. 장을 여는 것까지가 나의 작업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관계의 미학》을 읽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작가가 아니라 이론가와 세상이 하는 것이다.
현재 준비 중인 작업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인위적인 개입없이 식물이 스스로 자라도록 하는 방식의 식물 키우기에 푹 빠져있다. 나의 사고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3년 전부터 타이완에 사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제작 중이다. 얼마 전 퇴직한 농부에 대한 작업을 마친 상태다.
임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