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PEOPLE 《나의 미술기자 시절》 출간한 1세대 미술 언론인
‘거북이 기자’의 미술 인생
이구열의 《나의 미술기자 시절》이 지난해 말 출간됐다. 이구열에 대한 설명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기자 이구열의 취재 노트’란 부제는 더할 나위 없다. 회고록을 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위의 권유로 소일거리 삼아 기자 시절 쓴 기사와 이후 저작의 중요부분을 발췌해 묶었다. 또한 각 글이 쓰인 배경과 이후의 상황 묘사를 덧붙여 기사와 관련된 미술계의 논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매일같이 사무실에 출근해 자료를 정리하고 ‘독수리 타법’으로 틈틈이 써온 글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 책이 오래전 일들을 회고하며 적어 내려간 글임에도 불구하고 필력이 생동하는 까닭은 고령에도 글쓰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구열은 기자시절부터 기사 말미에 자기 이름 중간 글자를딴 ‘龜’를 넣어 종결지으면서 일찍이 ‘거북이 기자’, ‘거북 씨’로 불렸다. 1959년 미술기자 활동을 시작해 1973년 기자 생활을 마감하면서 연구소를 차리고 미술비평을 해온 ‘거북 씨’의 글은 한 사람의 인생이자 한 시대의 증언으로 읽힌다.
“미술 전문기자 1세대”라는 타이틀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지금이야 미술계의 원로로서 명성을 갖지만 미술 저널리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딜 당시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배 세대의 모델이 없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보는 늘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미술 전문기자가 전무하던 시기에 그의 기사는 미술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단비와 같아서 자연히 기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미술계의 좌표가 서서히 다져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자, 비평가, 연구자의 일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각자의 직업에 따라 기록의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미술에 대한 기록자이자 연구자로서의 사명감과 전문성에는 차이가 없었다. 저널리스트로서 이구열은 기사에 전문성을 부여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또 기록했다. 그는 현장에서 작가, 이론가들과 만나며 보고 들은 것을 사소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에는 미술인들의 흔한 일상적 대화였지만 이렇게 모인 기록은 현재 한국 근현대미술의 귀중한 아카이브 자료가 됐다. 또한 국내 미술전문 매체가 전무한 상황에 해외 미술의 경우는 아쉬운 대로 신문사에서 구독하는 잡지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 등에 간간이 실리는 예술기획기사를 면밀히 살피는 것으로 대신했다. 타고난 정보욕과 자료욕으로 자료를 필기하고 기사 스크랩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1년 설립된 삼성미술관 리움의 ‘한국미술기록보존소’는 그가 기증한 약 4만여 건의 자료와 책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다. 1975년부터 그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도 귀중한 자료가 겹겹이 포개져있는 정보의 보고다. 미술평론가 이일의 사라진 원고에 대한 일화는 그의 넘치는 자료를 반증한다.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미술을 전담하던 시절 그는 편집 진행부터 디자인까지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는 미니 미술잡지 《미술》을 창간했다. 제2호를 준비하면서 미술평론가 이일이 파리에서 유학 중이란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이일에게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미술계 동향을 정리한 글을 청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어렵게 원고를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미술》은 5·16군사정변 이후 위태로워진 출판사의 경영난으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사무실에 두었던 이일의 원고는 수많은 자료와 뒤섞여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2007년 우연히 사무실의 한 캐비닛에서 사라졌던 원고가 발견되었다. 그 원고는 같은 해 《미술평단》의 ‘이일 추모 호’에 게재됐다. 40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일의 자료에 얽힌 사연만큼이나 《미술》 자체는 큰 의미를 지닌다. 비록 창간 즉시 사라지는 비운의 숙명을 맞았으나 우리나라에서 미술 전문잡지를 시도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잡지의 구성이다. 최순우, 김원룡, 이경성, 조희룡 등 당대 최고 전문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고 고미술부터 현대미술, 해외미술 동향을 기사화했다. 특히 인상적인 기획으로 이구열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를 그린 춘곡 고희동과의 인터뷰를 꼽는다. 열흘 가까이 진행된 특별 인터뷰는 고희동의 살아생전 유일한 증언으로 남았다.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아카이브인 것이다.
그는 미술기자를 그만둔 이후 지금까지 미술 언론인이자 비평가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미술에 대한 안목은 선택의 문제다. 그 선택은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인정받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설사 동의하지 않는 독자가 있더라도 감수하고 기자 개인의 뚜렷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끝없이 공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보충해 나아가야 한다”며 미술 전문 언론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언했다. 비단 미술기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미술계의 모두에게 전하는 원로의 충고다.
임승현 기자
이 구 열 Lee Guyeol
1932년 태어났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민국일보사, 경향신문사, 서울신문사, 대한일보사에서 미술기자로 재직했다.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본부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근대한국미술의 전개》 《한국문화재수난사》 《나혜석-그녀,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2014년에는 《나의 미술기자 시절》을 발간했다. 1975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세우고 약 40년 동안 미술계와 문화재 발굴 현장의 중요내용을 기록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