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1
‘누끼’ 사회
김신 디자인 칼럼리스트
어떡하다 보니 방송 출연을 하게 됐다. 어떤 공방을 찾아가 제작 과정을 촬영하는 거다. PD가 오더니 ‘누끼’로 간다고 한다. ‘누끼!’ 잡지 밥 좀 먹은 나도 누끼는 좀 아는데. 그 PD가 방송 촬영에서 누끼는 어떤 과정을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라 나중에 편집할 때 순서를 맞추고 일단 되는대로 찍는 거라고 설명해준다. 잡지 편집에서는 사진 속 대상을 가위로 오려내듯 따내서 배경을 날려버리는 걸 뜻한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이는 거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방송이든 인쇄 미디어든 중요한 건 최종 결과물이다. 어떻게 촬영하든 최종 결과물이 대중에게 어색하지 않고 이해할 만하면 된다. 누끼란 결국 맥락을 제거하는 것이 아닐까.
방송에서는 어떻게 촬영했든 최종 편집에서 그 흐름이 자연스러우면 된다. 일단 많은 내용을 찍어서 재료를 풍부하게 만든 뒤 취사선택하고 순서를 좀 바꿔주면 얼마든지 매끄러운 이야기와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누끼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악마의 편집’을 가능케 하는 건 바로 이런 식으로 그 복잡한 맥락을 제거해서 메시지를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편집에서 누끼란 특정 피사체만을 따로 떼어내 배경과 분리함으로써 그 피사체의 사회적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전쟁터 속 군인도 누끼 따버리면 평온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누끼의 또 다른 목적은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복잡한 배경을 제거하면 피사체는 눈에 더욱 띄게 마련이다. 스튜디오에서 모델들은 늘 아무것도 없는 하얀색 벽면을 배경으로 카메라에 잡힌다. 누끼 따기 쉽게 말이다. 패션 잡지 표지 속 여신들을 보라. 아무것도 없는 흰색 바탕 위에 누끼 따진 상태로 하얀색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고 있지 않은가. 이는 마치 미술관의 흰색 벽에 걸려 있는 예술작품과 같은 것이다. 예술의 탄생 자체가 바로 이 누끼의 과정이다. 인물화와 조각은 그것이 원래 놓인 위치에서 미술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즉 누끼 따짐으로써 그 사회적 기능과 역사적 맥락을 상실하고 말았다. 순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디자인은 미술관에 입성하고자 더욱 처참하게 누끼 따졌다.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1934년에 개최한 최초의 디자인 전시는 <기계미술전>이다. 이 전시에는 프로펠러, 볼 베어링, 스프링 등이 전시되었다. 그것들은 각각 비행기, 공장의 거대한 기계와 같은 기능적 맥락에서 벗어나 추상적 형태의 순수한 미적 가치만이 돋보이도록 철저하게 누끼 따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사물을 미술관에 들여놓는 일은 고상한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에게 몹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누추한 사물에서 최소한의 미적 가치만을 누끼 따서 전시함으로써 자존심의 상처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미술관에 전시된 디자인으로는 그 진정한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능적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내용은 증발하고 오직 형식미만 남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맥락을 제거함으로써 그에 대한 이해도를 낮추거나 편협한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들려고 하거나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할 때 사람들은 그를 누끼 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나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을 보면서 그런 유혹에 빠진 후보를 보았다. 그는 청문회나 법정의 피고인에게 질문하듯 상대 후보에게 자꾸 “예” “아니오”로 답하라고 종용한다. 예, 아니오의 강요는 맥락 없는 결과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누끼 따기형 질문이다. 상대 후보자가 대답을 회피하고 상황 설명을 길게 하는 것은 맥락을 회복하려는 방어 행위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앞뒤 맥락을 다 알아야 한다. 누끼 딴 피사체의 배경을 살려야 하고, 문장의 앞 뒤를 충분히 들어야 하며, 사물이 위치한 생활 공간을 다 보아야 한다.
방송, 잡지, 책, 미술관 등 모든 미디어에서 누끼는 필수적이다. 미디어는 비싸기 때문이다. 지면, 시간, 공간이 부족하다. 모든 정보를 다 담을 수는 없다. 간추려야 한다. 미디어의 누끼 행위는 어쩔 수 없어 보인다. 대신 시청자, 독자, 관객도 모든 걸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정치적 대립이 극심한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기보다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이 누끼 행위가 성행한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언제든지 나도 누끼 따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하면서 말이다.●
1934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최초의 디자인 전시 <기계미술>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