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9
창조 적당히 합시다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미팅을 하려 경복궁역에서 내려 서촌을 걸었다.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상권이 엄청나게 뜬 곳이다. 중국과 한국 관광객들로 붐빈다. 인왕산과 북악산, 경복궁과 사직공원, 옛날 도시형 한옥과 골목길이 있는 예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싶다. 어지러운 간판들 때문이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단 하나 거리의 간판 디자인만 빼놓고 말이다. 간판 속 한글 서체는 모두 대학에서 정규 디자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디자인한 거다. 그렇지만 옛날에 디자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간판장이들이
간판 만들 때보다도 더 형편없어진 거 같다. 왜 그럴까?
옛날에는 무식한 간판장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멋을 부려가며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 옛날부터 내려오거나 그 시대에 널리 쓰이는 글꼴을 선택해서 글자를 만들었다. 전화 취급소나 버스표 판매소를 알리는 양철간판, 이발소나 쌀집, 도장집을 알려주는 나무입간판, 아무 장식도 없는 백색 바탕에 고딕체로 중량감 있게 쓴 메인 간판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정도에서 벗어난 못났거나 요란한 간판을 보기 힘들었다. 그건 그걸 쓴 사람의 솜씨라기보다 전통과 시대의 솜씨다. 개성의 과시나 열정적 창조 따위는 주인이, 동네 사람이, 그리고 간판장이 스스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창조적인 능력이 없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간판이 없다는 건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드는가! 아니 오히려 “창조하라”는 사회적 강요가 없기 때문에 간판들은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이 창조로 먹고사는 나라인 양 떠드는 오늘날의 간판을 보라. 대개는 붉은 색, 파란색, 노란색, 심지어는 핑크색 또는 무지개색, 그라데이션 효과를 바탕으로 글자가 쓰였다. 또는 업종을 표시한다고 간판 배경에 시골의 목장이나 음식이 끓고 있는 찌개, 소, 돼지, 생선 따위가 인쇄돼 있다. 상점 간판 하나에 심벌, 업종 관련 사진, 글자, 타원과 같은 그래픽 요소, 게다가 글꼴마저 여러 가지, 온갖 색상들로 무질서를 넘어 방종, 방탕, 난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산업혁명시대의 수준 낮은 바로크 스타일을 보는 것 같다. 글꼴은 또 어떤가? 개성이 지나치다고 하는 건 과분한 평가다. 그냥 수준 이하의 글꼴이 수두룩하다.
글꼴 회사들이라고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글꼴의 가치를 몰라주니 돈 주고 사지 않는다.
또 영문 알파벳에 견주어 너무나 많은 수의 글자를 디자인해야 하니 생산성과 효율이 떨어진다. 한글 서체는 오로지 한국시장에서만 팔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상품이다. 그러니 생산하는 모든 서체를 다 완성도 높고 아름답게 디자인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인정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글꼴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구색을 갖춰야 해서, 고객이 다양한 걸 찾으니까 라고 변명하지 말자. 왜냐면 불행하게도 어떤 상점 주인이나 간판업자는 그런 형편없는 글꼴로 간판을 만들어 시민들의 눈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간판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이런 걸 이슈로 삼는 건 진부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개선이 안 되는 걸 넘어 나빠지기까지 하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나는 이 문제에 대안을 낼 능력이 없다. 단지 창조의 압박, 다시 말해 남과 달라야 한다는 내부, 또는 외부의 강요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실 거창한 창조는 그다지 필요 없다. 글자를 쓰고 읽는 대다수 사람은 글꼴이 많지 않은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상점 주인도 간판업자도 이상한 글씨가 있어서 골라 쓴 것이지, 없었다면 아마도 더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단순한 명조체 같은 글꼴로 간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상품의 구색 때문에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면 기본 글꼴에서 조금만 변화를 주어 출시하는 건 어떨까? 차별성과 동시에 완성도도 높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개성과 창조에 매달리다보면 사람이 손으로 쓴 흘림체 같은 걸 바탕으로 한 글꼴 만들기의 유혹에 빠져들고, 괴물을 낳기 쉽다. 창조의 압박이나 경쟁 없이도 아름답고 정겨운 간판세계를 만들었던 옛날 사람들의 평화롭고 느긋한 마음이 새삼스럽게 부럽다. ●
위 정희우 <종로의 나무간판> 시리즈 2014 갤러리 그리다에서 열린 개인전(2014.11.26~12.7) 광경 작가는 종로의 나무간판을 탁본으로 떠내 전시장에 나란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