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Manifesta 10
유럽을 순회하면서 열리는 <마니페스타(Manifesta)>의 올해 개최지는 러시아 북서부에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였다. 이번 대회는 6월 2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열렸는데 <마니페스타> 창립 20주년과 에르미타주 박물관 개관 250주년이 맞물려 그 의의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명한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가 기획해 더욱 화제를 모은 이 대회는 그러나 러시아 의회의 반동성애법 가결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 정치,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신 냉전의 장벽 앞에 멈춰 선 <마니페스타>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수석학예사
2014년은 국내 비엔날레 역사에 ‘수난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는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을 두고 검열과 표현의 자유 문제가, 부산비엔날레에서는 감독 선정 과정에서의 문제가 불거져 올 한 해 미술계 이슈를 장악했다. 양대 비엔날레에서 불거진 문제는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나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아직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서 부족하다는 현실을 드러냈다. 특히, ‘유신체제의 부활’이라고 불리는 박근혜 정부에서 직면한 ‘비엔날레의 파국’은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표현의 자유조차 검열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 점에서 심각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비단 국내 비엔날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올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도 비슷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노매딕 유럽 비엔날레 <마니페스타(Manifesta)>는 1990년대 초 유럽 통합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도쿠멘타와 같이 정기적이고 특정 장소에만 한정된 제도화된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탄생된 비엔날레다. 이 비엔날레는 시작부터 유럽의 문화적 통합을 지향했기 때문에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냉전이 사라진 유럽체제를 반영하고자 했다. 특히, 유럽의 지역적 성격을 반영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인구 10만 명 미만의 작은 도시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또 월드컵처럼 유치위원회를 통해 개최 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에 비엔날레 실무 팀이 매번 새로 구성된다. 이러한 조직 운영은 제도적 한계를 넘어서는 실험이 가능하다는 장점과 함께 매번 불안정한 시스템하에서 운영되는 단점이 있다. 일례로 2006년 키프로스의 니코지아에서 열리기로 했던 제6회 비엔날레는 주최 측의 지나친 검열을 이유로 작가들이 참여를 거부하면서 행사가 취소되기도 했었다.
이번 행사는 <마니페스타> 창립 20주년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개관 250주년을 동시에 기념하는 비엔날레로 준비되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유럽연합(EU)의 국가도 아니며 문화적으로도 유럽에 소속되었다는 결속감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북쪽 베니스’로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니페스타>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은 제8회 스페인 무르치아비엔날레 당시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면서 유럽의 접경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충돌과 융합 현상에 주목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유럽적이면서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 Feder Mikhailvicho, 1821~1881)나 러시아 문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고골(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 등 유명한 인문예술가들을 낳은 곳이다. 1700년대 피터 대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정시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권위적인 바로크식 건물들로 가득 차 있어 유럽의 그 어느 도시보다 절대 군주의 권력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하지만 아름다운 네바강을 따라 펼쳐진 43개의 섬을 연결한 이 도시는 해마다 1000만 명에 근접하는 여행자가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마니페스타 10>은 신냉전체제로 진입하는 러시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의 문화적 진입통로로 삼고자 했다.
이 전시의 예술감독을 맡은 카스퍼 쾨니히(Kasper Konig)는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관장을 지내고 은퇴한 70고령의 베테랑 큐레이터다. 그는 또한 1977년 클라우스 부스만과 함께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설립하여 운영한 인물이자 세계적인 공공미술 기획자 중에 하나다. 쾨니히는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고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 시절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조안나 와르자(Joanna Warsza)를 큐레이터로 초빙했다. 그녀는 지난 7회 베를린비엔날레(2012)에서 우크라이나의 여성 그룹 ‘페멘’, ‘전 세계 테러리스트 정상회담’(요나스 슈탈)등을 초대하면서 ‘삶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정치적 예술’을 전면에 내세웠고 ‘오쿠파이 시위대’를 비엔날레 현장에 초대해서 정치적 토론과 시위로서의 비엔날레를 성사시킨 바 있다.
최근 비엔날레 조직에서 보기 드문 화려한 큐레이터로 꾸려진 <마니페스타 10>에 대한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2013년 러시아 의회가 ‘반(反)동성애법’을 단 한 사람을 제외한 436명의 하원의원 만장일치로 찬성해서 통과시키고 나서다. 러시아의 행동주의 그룹 ‘초 델랏Chto Delat’(초 델랏은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설립된 행동주의 그룹으로 섹스피어의 소설 햄릿에 나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문화예술가 비평가, 문화이론가들이 모여 러시아의 문화사회적 행동을 고민하는 그룹으로 지식정보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http://chtodelat.org/)을 비롯해서 전시에 초대받은 작가들은 반인권적인 이 법을 반대하며 비엔날레 참여를 거부했고, EU의 국가들은 연일 이 법의 철회를 요구하며 외교적 대치정국에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의 국가들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자, 유럽 내 1500명이 넘는 예술가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제6회 니코지아 상황이 재현되는 악몽의 순간에 기자회견을 자처한 카스퍼 쾨니히는 “나는 아주 강력하게 이 비엔날레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시민들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시는 예술, 교육, 공공논쟁, 시민사 발전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전시를 지속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에서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비엔날레는 러시아 법 내에서 표현의 자유를 고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문제들을 배제한 전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마니페스타> 재단은 “<마니페스타>가 전시를 중단한다면 그것은 지난 세기 냉전정치를 반복하는 것이자 러시아의 문화적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는 6월 28일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여러 공간을 활용해서 오픈되었다. 출품작들에서 그동안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 티무르 노비코프(Timur Novikov), 알렉산드라 수카레바(Ale-xandra Sukhareva) 등 러시아 출신 작가들, 구 소비에트 연방 국가 작가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제너럴 스태프 빌딩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 공간은 동시대예술 전시를 위해 새롭게 리모델링해서 이번 <마니페스타>를 계기로 일반에 공개됐다. 바로크식 외관의 건물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이 빌딩은 자연 채광의 보기 드문 건축적 아름다움을 내포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들어선 토마스 히어쉬호른(Thomas Hirschhorn)의 <붕괴(Abschlag)>는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린 장면을 연출했다. 종이상자와 비닐 등 가변적인 재료들로 표현된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은 3층 높이의 건물로부터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붕괴(Abschlag)>는 어느 한 파국의 역사적 순간에 드러나는 진실들을 보여주었다. 시스템이 유지될 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이면에 내포하고 있던 공간들과 그 공간을 지지하고 있던 실체들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역사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파국의 경험을 개인적으로 접근한 또 다른 작가는 벨기에 출신의 프랜시스 앨리스(Fancis Alys)였다. 에르미타주박물관 겨울궁전으로 들어가는 정원에 자동차 한 대가 나무를 들이받고 멈춰 서 있는데, 이 자동차는 1980년대 구 소련연방에서 제조되어 서유럽권에 판매되었던 녹색 라다 리바 1500(Lada Riva)이었다, 프랜시스 앨리스는 30년 전 동생과 함께 무작정 모스크바로 가기로 하고 떠난던 여행에서 같은 회사의 자동차가 독일 국경을 얼마 벗어나지 못해서 멈추어 섰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끝이 없다면 시작도 없습니다.” 이 공원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자동차가 굉음과 함께 멈추는 장면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해석된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충돌의 순간을 맞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서로 다른 시점의 영상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동시에 자동차를 멈춰 세우는 충돌은 어떤 시작을 위한 파국을 말하고 있었다. 프란시스 앨리스의 암울한 파국의 메시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카지노나 서커스 홍보 자동차처럼 보이는 조르디 콜로머(Jordi Colomer)의 자동차는 “No Future” 문구가 깜박이는 네온 간판을 달고 전시 기간 내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돌며 미래에 대해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