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아티스트] 임상빈-달콤한 풍경의 씁쓸함, 씁쓸한 예술의 달콤함
류한승│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임상빈의 주요 작업은 사진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화면에는 배경과 어 울리지 않는 커다란 안경이 등장하거나 위아래로 지나치게 늘어난 건물이 우뚝 솟아있으며, 커다란 벽면에는 무수히 많은 미술품이 걸 리기도 한다. 또 원근법에서 벗어난 어색한 구도라든지 광각렌즈로 본 것 같이 가장자리가 휜 구도라든지 사람의 시야를 비웃기라도 하 듯 좌우로 펼쳐진 파노라마 구도가 드러나며, 때론 화면이 인위적으 로 위아래 혹은 좌우로 구획되기도 한다. 더불어 작품에 등장하는 어 떤 사물과 풍경은 그림을 그린 것 같이 부드러운 질감과 테두리를 가 지고 있다. 분명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풍경을 작업의 소재로 선택하 지만, 그의 작업은 어딘지 어색하고 엉뚱하며, 심지어 초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본다는 것’이다. 무언 가를 보려면 당연히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그 무언가를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임상빈은 그 무언가와 그것을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위치’도 주목한다. 사실 그 위치는 작가의 위치이다. 일찍이 시선과 관점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보는 이의 위치를 암시할 수 있는 특정사물을 종종 작업에 포함시켰다. 백미러와 와이퍼를 통해 그가 차 안에 있다는 것을, 난간을 통해 그가 어딘가에 올라가 있다는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왜곡된 도로, 인도, 축대 등을 통해서도 작 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는 멀리 있는 피사체에 초점을 맞 췄을 때 가까이 있는 사물이 왜곡되어 곡선처럼 보이는 현상을 활용 한 것이다.
게다가 임상빈은 한 위치에서 바라본 다양한 광경을 한 화면에 넣 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작가가 2층에 있다면, 화면 아랫부분에는 부 감법처럼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본 광경을 묘사하고, 화면 중간에는 평원법처럼 2층에서 정면을 바라본 광경을 배치한다. 화면 윗부분 에는 고원법처럼 2층에서 천장을 올려다본 광경을 표현했다. 그 결 과 각도의 시점이 결합된 스펙터클한 광경이 펼쳐지고, 그로 인해 그 광경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위치가 더 핵심적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광대하고 역동적인 광경을 만들어내며 관찰자와 사물의 관계를 부 각시킨다. 이것은 사물(풍경)을 인식하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사물(풍경)을 인식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을 드러낸다. 계속해서 임상빈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위치에 사람들의 욕 망과 심리를 담고자 했다. 그런 의도가 반영된 작품이 바로 시리즈이다. 이 연작의 소재는 맨해튼이다. 그런데 맨해튼 내부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강 너머에서 맨해튼을 바라 본 것이다. 그래서 맨해튼은 물 위에 떠 있는 환상의 섬처럼 보인다. 강 너머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시선에는 맨해튼을 동경하고 갈망하 는 마음이 들어 있다. 이는 맨해튼에 속하지 못한 타자의 시선을 의 미한다. 비록 같은 미국인이더라도 맨해튼에 진정으로 소속된 사람 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은 동양인으로서 미국 주류 사회를 갈망한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이 연작에서 임상빈은 어떤 한곳에서 맨해튼을 바라본 것이 아니 었다. 맨해튼의 어떤 지점을 타깃으로 설정한 후, 마치 타자의 시선 이 여러 개임을 암시하듯, 맨해튼 외부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합성하여 스펙터클한 맨해튼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맨해튼의 빌딩은 비교적 일정한 형태를 유 지하고 있었지만, 유동적인 강물과 하늘은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즉 건물이 딱딱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가진다면, 자연은 유동적이고 유기적이었다. 그런 자연의 특성을 시각화하기 위해 임상빈은 ‘회화 적 텍스처’를 도입한다. 하늘을 표현할 경우, 먼저 카메라로 하늘을 찍고 이어서 하늘의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린 다음 그것을 촬영한다. 이후 이 두 종류의 이미지를 컴퓨터에서 혼합하여 독창적인 하늘의 이미지를 고안한다. 사물의 윤곽을 표현함에 있어 회화적 텍스처로 부터 나오는 ‘soft edge’는 사물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비해, 사진으 로부터 나오는 ‘hard edge’는 사물을 차갑고 딱딱하게 만든다. 그는 이 두 요소를 다각도로 활용하여 섬세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연출한 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다분 히 회화가 포함된 사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탐구는 미국 생활 이후에 비로소 진행되 었다. 작가의 고향이 서울이지만, 외국에 살다보니 서울에 있을 때 모르던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서울은 맨해튼에 비해 문화유 적이 많은데,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한국의 고궁이 매우 왜소하게 느 껴졌다고 한다. 이 건축물이 세워질 땐 대단히 웅장했을 것이다. 그 런데 현대의 눈 또는 서구의 눈에 이 건물들은 작고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즉 스펙터클은 상대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펙터클을 보완 하기 위해 건물을 상하로 늘인다. 이것이 이른바 연작 이다. 흥미롭게도 이 아이디어는 인터넷에서 취한 것이다. 예전에는 인터넷에서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하면 이미지가 쭉 늘어날 때가 가 끔 있었는데, 이는 데이터 전송량이 적어서 순간적으로 디지털 시그 널에 에러가 났기 때문이다.
임상빈의 작업은 대부분 컴퓨터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는 1990 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와는 거리가 꽤 멀던 사람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군대에서 컴퓨터를 배웠고, 제대 후 본격적으 로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 이미지의 변형· 배치·구축은 회화에서보다 훨씬 용이하였다. 당시 그는 아날로그 와 디지털의 접목·변환·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했지만, 그렇다 고 그가 디지털 신봉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디지털의 한계를 경계하며 그 가능성을 다각도로 고민했다.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은 이후 연작에서 잘 드러난다. 임상빈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모두 카메라에 담고 그것을 한 화 면에 배치했다. 예컨대 메트로폴리탄의 모던아트 섹션에 있는 모든 작품을 사진 찍고, 실제보다 훨씬 긴 벽과 마루에 모든 작품을 배열 한다.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하면 한눈에 모든 컬렉션을 조 망할 수 있다. 미술관은 이 작품들을 소장해서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미술관이 소장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가치를 가졌 을 수도 있다. 하여튼 미술관은 이 미술품으로 인해 사람들과 자본을 끌어 모으며 문화권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 제반의 사정을 알면 이 작품들을 그저 감상적으로만 보기가 힘들다. 너무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측면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도시의 문화체육 시설(공원, 운동경기장, 도서관, 미술관 등)을 작업의 소재로 끌어들 인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 지만, 거꾸로 사람들의 루트와 행태를 분석하고 그곳에 이런 것을 지 어놓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일 수밖에 없다.(이렇게 사람들이 모이 면 그 광경 또한 스펙터클하게 보임)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사람들 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이지만, 도시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모인다. 이처럼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하고 충 돌하면서 만들어지며, 작가 역시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하고 충돌하 면서 작품을 제작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도시 풍경이 아니 라 미시적 힘들이 꿈틀대는 도시 풍경이다.
이미지의 왜곡과 변형을 통한 실재의 표현
최근 임상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찍고 있다. 이과수폭포, 와이키키, 칸쿤, 발리 등. 그는 어딘가를 가보고 거기의 에너지를 경 험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그곳에 대해 말해주고자 한다.(그의 이야기 를 들어보면 거기엔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 그중 이과수폭포 작업 을 보면, 그는 다양한 지점에서 사진을 찍고 재구축하여 스펙터클한 광경을 연출했다. 사실 이과수폭포 같은 광대한 자연과 에너지를 한 지점에서 포착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그는 화면 에 카약, 행글라이더, 물안경을 등장시키며 화자 중심의 이야기를 생 성해낸다. 마치 그가 카약을 타고 폭포를 뛰어내린 것처럼, 마치 행 글라이더를 타고 폭포 위를 날아다닌 것처럼, 마치 스노클링을 하며 물속을 헤엄쳐 다닌 것처럼. 물론 그가 실제로 이런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 가서 직접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부 심과 우월의식을 심어준다.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건 개인적 성취이 건 유명한 관광지이건, 자신의 경험이 최고인 양, 그 경험에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여 자신만의 버전을 구성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과 장이 때론 공감을 주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 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의 내면과 심 리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말 시작된 남극 프로젝트도 이와 비슷하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남극은 탐험가가 아니면 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 런데 요즘에는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남극을 방문하여 안전하게 자 연의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 이제 남극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 이다. 작가는 작은 나무보트를 타고 이곳을 모험한 것처럼 자신을 그 려내고 있다. 역시 실제로는 그렇게 못 했어도. 남극을 둘러싼 이권 과 온난화로 빙하가 녹는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극 풍경은 이미 우리에게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한편 임상빈은 싱글채널 비디오와 사운드 설치작업 등도 병행하 고 있다. 한숨을 쉬며 인생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한숨 프로젝트>, 누 군가가 계속 작가의 이름을 부르는 <구애 프로젝트>, 연예기획사 담 장에 낙서를 읽는 <벽화 프로젝트>, 물/불/숲/바람 등 기본 요소를 그린 <창조 프로젝트>, 관객을 최면에 거는 <최면 프로젝트> 등이 해 당된다. 모두 미공개 작업으로 예술의 의미와 역할을 물으며 예술가 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이다.
비록 이전 작품과 형태는 다소 다르지만, 그가 예술 활동을 하며 겪었던 예술가의 기대, 욕망, 허영, 좌절, 자기만족, 자기최면 등을 솔 직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술가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 적이고 완벽한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 사람과 만나고 관계하고 충돌 하는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처럼 어떤 때는 달콤하지만 어떤 때는 씁 쓸하다. ●